여전히 어렵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호르몬’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 그저 성호르몬에서 파생된 야릇한 상상 정도가 전부다. 하지만 인체의 기분, 수면, 성장 등 모든 대사 작용에 관여하는 근간이 바로 호르몬이라고 한다. 특정 기관에서 생성되어 혈액 속을 떠돌다가, 자신을 알아봐 주는 단 하나의 ‘표적 세포’를 만나면 비로소 기적 같은 화학 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인간의 ‘인연’이라는 것도 이와 참 닮았다. 우리는 평생 수천, 수만의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지만, 대부분은 아무런 작용 없이 그저 흘러간다. 내 휴대폰 연락처에 저장된 수백 명의 이름 중에서도, 지금껏 꾸준히 안부를 묻는 사람은 고작 열 명 남짓이다. 그 수많은 스침 속에서, 어떻게 서로의 표적 세포가 되어 관계라는 이름의 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걸까. 나는 며칠 전, 한 결혼식장에서 그 화학 작용의 가장 경이로운 순간을 목격했다.
청첩장을 받았을 때 나는 내심 기뻤다. 신랑은 예전 직장의 후배로, 지방에서 올라와 오랜 시간 홀로 자취하며 누구보다 성실하고 활달하게 살던 괜찮은 친구였다. 오랜 연애가 실패로 끝난 뒤에도 꿋꿋하던 그가 마침내 마흔 중반에 인연을 만났구나 싶었다.
그런데 청첩장에 적힌 신부의 이름이 낯익었다. 아니, 웬걸.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 또한 같은 직장 직원이었는데, 꼼꼼한 성격과 깔끔한 일처리로 칭찬이 자자했다.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알기로, 이 둘은 같은 직장 내에서 서로의 존재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접점이라고는 없는 두 사람이었다. 신랑은 10여 년 이상 그 직장을 다녔지만 신부는 2년 정도 다니다가 다른 회사로 이직했기에 더더욱 그들이 만날 일은 없었던 것이다.
결혼식장, 나는 신랑과 신부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인연은 묘하다. 각자의 혈관 속을 외롭게 떠돌던 두 개의 호르몬이, 수많은 세포들을 스쳐지나 마침내 서로라는 ‘표적 세포’를 찾아낸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는 서로를 완벽하게 알아본 화학 작용의 결과, 즉 ‘행복’이라는 빛이 가득했다.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의 인연들이 스쳐 지나갔다. 거래가 끝나자마자 차갑게 돌변하던 수많은 얼굴들. 그들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는 언제부턴가 함부로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새로운 인연을 맺는 데 서툴고, 관계의 폭은 늘 좁았다. 연약한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 신부가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며 내 테이블로 다가왔다. 후배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선배님,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예전에 선배님이 제게 해주셨던 조언들이 큰 힘이 됐습니다.”
그의 진심 어린 말에,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내 인연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그들의 대사 작용에, 인체 활동에, 그리고 사회 활동에 나는 과연 좋은 호르몬이었을까. 누군가에게는 행복을 촉진하는 긍정적인 호르몬이었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분을 망치는 스트레스 호르몬은 아니었을까.
나는 두 사람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건넸다. 서로에게 가장 좋은 호르몬이 되어주라는 맘속의 덕담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내가 스쳐 지나온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이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화학 작용을 겪었기를 감히 바라 본다.
참, 일본에서는 소나 돼지의 내장 요리를 ‘호르몬’이라고 한다. 활력을 주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