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나누다

La Strada

by 수요일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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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 영상에서 ‘Del veien’이라는 노르웨이 말을 보았습니다. ‘길을 공유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광활한 땅에 적은 인구가 흩어져 사는 나라, 그곳의 도로는 대부분 왕복 2차선 길이라고 합니다. 그 단어 하나가 머릿속에 그려낸 풍경은 퍽이나 평화로웠습니다. 유럽을 여행해 본 분들이라면 아마 익숙한 모습일 겁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길 위를 자동차와 자전거, 오토바이가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며 유유히 흘러가는 풍경 말입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다 문득 우리의 도로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반도로, 지방도로, 국도, 고속도로에 이르기까지 도로의 등급을 나누고, 그에 따라 속도와 통행 가능한 차종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각기 다른 목적과 속도를 가진 이동 수단 간의 불협화음을 막는, 가장 선진화된 체계인지도 모른다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규칙과 시스템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게 됩니다. 다른 여러 나라의 고속도로를 자유롭게 달리는 오토바이들을 보며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Del veien’이라는 아름다운 개념에 공감하면서도, 왜 그들의 도로 정책에는 선뜻 동의하지 못하고 오히려 미개하다고까지 느끼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매일 목격하는 도로 위의 살풍경 때문일 겁니다. 칼날처럼 차선을 파고드는 ‘칼치기’ 주행, 보행자의 안전을 위협하며 인도를 질주하는 모습, 횡단보도의 붉은 신호등을 무시하고 내달리는 아찔한 풍경들. 한국의 오토바이 운전자들이 보여주는 일부의 무질서한 모습은 ‘공유’와 ‘신뢰’라는 단어를 무색하게 만듭니다.


그런 기억과 경험이 쌓인 우리에게 ‘고속도로에 오토바이 통행을 허용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시나리오를 그리게 합니다. 어떤 끔찍한 사고들이 연쇄적으로 벌어질지 너무나 명확하게 예측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Del veien’, 길을 공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제도나 법규의 문제가 아니라, 그 길을 함께 달리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문화의 문제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신뢰의 약속을 지킬 때 비로소 가능한 이상향인 셈입니다. 우리의 도로에 오토바이의 두 바퀴를 허락하지 않는 지금의 조처가, 어쩌면 혼돈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최선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는 것은 그래서일 겁니다. 아름다운 이상과 위태로운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오늘도 복잡한 마음으로 핸들을 잡습니다.


뉴욕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붉은 신호등이 켜진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 있는 사람들은 관광객이고,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는 사람들이 바로 뉴요커라고 말입니다. 처음엔 그저 우스갯소리려니 했는데, 막상 그곳의 거리를 지켜보니 정말로 많은 이들이 정지 신호를 유유히 무시하고 길을 건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저를 놀라게 한 것은 신호를 위반하는 보행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운전자들의 침묵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단 한 사람도 경적을 울리며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보행자가 지나가기를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장면을 서울 한복판으로 옮겨와 봅니다. ‘우회전 시 일시 정지’마저 법규로 강제해야 하는 우리의 도로에서, 만약 보행자가 버젓이 신호를 위반하고 차 앞으로 걸어 들어왔다면 어떤 불상사가 벌어질지는 보지 않아도 선명합니다. 아마 사방에서 날카로운 경적 소리가 고막을 찢고, 운전자의 험한 말들이 창문을 넘어 날아들었을 겁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요. 우리는 자원이 빈약한 땅에서 짧은 기간 안에 폭발적인 산업화를 이뤄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분방함보다는 단체나 조직의 질서가 우선시 되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었습니다. ‘효율’이라는 지상 과제 아래, 신호등과 같은 사회적 약속은 개인의 판단보다 우위에 서는 절대적인 규칙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더 빠르고 안전하며 모두를 위한 길이라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왜 그토록 합리성을 신봉하는 서구 사회에서는 보행자가 우선시 되고, 느리게 달리는 자전거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문화가 자리 잡았을까요? ‘효율’이라는 잣대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그들 사회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그 답은 ‘소유’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소유의 시대’가 저물고 ‘공유의 시대’가 온다고들 하지만, 돌이켜보면 우리네 삶은 무언가를 온전히 소유해 본 기간이 너무나 짧았습니다. 길고 긴 왕정 시대와 식민 시대를 거치며 개인의 재산권이란 언제든 국가나 권력에 의해 회수될 수 있는, 잠시 빌려 쓰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그렇게 억눌렸던 소유에 대한 갈망이 폭발한 것일까요. 우리는 그 어떤 민족보다 ‘나의 것’에 대한 애착과 소유욕이 강한 듯 보입니다. 내 가족, 내 아파트, 내 차, 그리고 내 땅. 이 ‘내 것’이라는 개념은 타협할 수 없는 강력한 독점력으로 작용합니다.


도로 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핸들을 잡는 순간, 차 앞의 공간은 공유지의 개념을 잃고 ‘나의 길’이라는 사적 영역이 되어버립니다. 그 영역을 침범하는 보행자나 더딘 자전거는 질서를 어지럽히는 방해꾼일 뿐, 함께 길을 공유해야 할 이웃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뉴욕 운전자의 침묵은 단순한 관용이 아닐 겁니다. 그것은 공공의 공간에 대한 이해와, 그 공간 안에서는 자동차보다 사람이 우선한다는 묵시적인 합의의 결과일 것입니다. ‘나의 길’이 아닌 ‘우리의 길’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에 가능한 풍경입니다. 붉은 신호등 앞, 그 짧은 몇 초의 기다림 속에 우리가 걸어온 역사와 사회의 초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해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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