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을(乙)
이 피 비린내 나는 강호에 발을 들인 이래, 나는 단 한 번도 천하의 주인이었던 적이 없었다. 금수저 문파의 자제도 아니요, 일개 분타의 타주 한번 못 해본 신세이니, 감히 천하의 패권을 논하는 것 자체가 가소로운 일. 그럼에도, 강호의 도리는 아는지라 평생을 슬픈 ‘을(乙)’의 숙명으로 살아왔을 뿐이다. 다음 생에는 부디 불심(佛心)에 기대어 대장부로 태어나길 바랄 뿐. 나무아미타불.
‘그’는 달랐다. 강호에 나타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그는, 특유의 자신감과 빙옥(氷玉) 같은 오만함으로 단련된 조약돌 같은 자였다. 노쇠한 원로들이 장문인 회의에서 어제의 무용담이나 나누며 세월을 낚고 있을 때, 그는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의 사정권에 든 자는 지레 겁을 먹고 주저앉았고,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음공(音功)은 상대의 혼을 흩뜨렸다. 거기에 밝은 갈색빛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眼光)이 더해지면, 천하의 항우장사라도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자가 없었다. 그는 태생부터 ‘갑(甲)’의 운명이었다.
마침내 갑(甲)과 그가 만났다. 구룡방(九龍幫)의 오랜 주인, 용(龍)의 기운을 타고난 ‘수퍼갑’과, 남만(南蠻)에서 떠오른 맹호(猛虎)의 기세를 지닌 ‘그’. 오호라, 천지신명이시여. 어찌하여 이들의 사주팔자마저 용과 호랑이였단 말인가. 모두가 숨을 죽인 첫 만남. 허나 초식은 가볍게 오가는 수인사로 끝났다. 서로의 내공(內功)을 탐색할 뿐, 감히 살수(殺手)를 날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알았다. 낡고 오래된 비급(祕笈)을 지키려는 늙은 용과, 새로운 무공으로 강호를 제패하려는 젊은 호랑이. 그들의 사이에는 이미 청천벽력 같은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었다. 한번 맞붙는다면 필시 천지가 무너지는 동귀어진(同歸於盡) 뿐. 그들은 마치 전설 속 무하마드 알리와 안토니오 이노키의 결투처럼, 서로의 그림자만 베고 있을 뿐이었다.
아뿔싸! 맹호의 식전 요리는 바로 나였다. 대업을 치르기 전, 칼날의 예리함을 시험할 제물이 필요했던 게다. 평생을 ‘을’로 살아온 세월이 누구보다 길었던 나였기에, 그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내 방문 앞에 팔짱을 끼고 섰을 때, 나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먹잇감. 나는 이미 털 뽑힌 닭 신세가 되어 있었다.
참고로 나의 직위가 그보다 높았고, 강호에 몸담은 세월 또한 길었다. 허나 분타가 달랐고, 쇠락한 문파를 살려야 한다는 대의명분은 같았다. 그가 나의 처소로 들어와 일갈했다.
“그리 처리해서는 아니 되오!”
그 목소리는 마치 도레미파솔의 ‘솔’ 음처럼 높았으나, 그 안에 담긴 추상같은 엄격함은 이미 나를 죄인으로 만들고 있었다. 오랜 수사관 경력의 친구 녀석이 말하길, 취조실 책상에 앉으면 누구든 두 발이 옹색해지고 두 손을 모으게 된다고 했다. 나는 이미 그의 눈빛 앞에서 피의자가 되어 있었다. ‘어버버’ 하는 사이에 조서는 꾸며졌고 형량은 정해졌다. 그의 마지막 일갈이 나의 뇌리에 박혔다.
“네놈의 죄는, 네놈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남의 집 불구경이 제일 재미있다 하였던가. 강호인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용호상박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그들은 고수였다. 서로의 살기를 거두고 동고동락(同苦同樂)을 택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정전 협정을 맺은 것이다. 그렇게 늙은 용과 젊은 호랑이의 기묘한 동거는 삼 년간 이어졌다.
세월이 흘러, 야심만만한 호랑이는 여전히 변화무쌍한 초식으로 무림을 활보하고 다닌다. 정파(正派)와 사파(邪派)를 가리지 않고 온갖 기공(奇功)을 흡수하여, 캐주얼파, 스포츠파, 심지어 신발 문파에 이르기까지 손을 뻗쳤다. 이제는 수많은 분타를 거느린 대지사장(大智社長)이 되어, 그 자신이 ‘갑’ 중의 갑으로 군림하고 있다더라.
후일담 하나. 그럼 그 시절의 늙은 용은 어찌 되었냐고? 소인도 그 문파를 떠나 잘은 모르지만, 천수(天壽)를 누리다 만수무강(萬壽無疆)을 꿈꿀 무렵, 새로운 패왕(覇王)이 나타나 그를 쳤다 하더이다. 이 바닥에 영생이란 없는 법. 결국 20여 년 이상 누리던 권세를 잃고 낭인(浪人)이 되어 칩거 중이라는 소문만 들려왔다. 허나 부자 망해도 삼 년은 간다더니, 강호를 떠났으되 금은보화는 산처럼 쌓아두고 지낸다 하니, 역시 소인의 팔자와는 다른 게다.
천지신명이시여! 나에게 호랑이 같은 담력과 용맹성은 바라지 않지만 현생에 쌓은 얄팍한 덕으로 다음 생애에는 “갑”으로 태어나게 해 주소서,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