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그리고 낡은 성(城)의 쓸쓸한 향기
살면서 만나는 인연에는 저마다의 향기가 있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스치기만 해도 마음 한구석이 환해지는 들꽃 같은 사람이 있고, 궂은 비바람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고목처럼 듬직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잘 닦인 조약돌 같아, 만날 때마다 그 매끄러운 지혜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가까이 다가설수록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낡고 높은 성(城)과 같은 인연도 있기 마련입니다.
제가 젊음의 한 시절을 바쳤던 회사의 사장님은 그런 성(城)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회사를 일으킨 창업주는 아니었지만, 격동의 세월 속에서 2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켜온 분이었지요. 세월은 그에게서 풋풋한 향기를 앗아가고, 누구도 틈입할 수 없는 두터운 갑옷을 입혔습니다. 그의 집무실에서는 늘 잘 정돈된 결재 서류와 도열된 파일철, 깜박거리는 모니터 그리고 그것을 노려보는 눈동자. 그는 결코 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었지만, 그가 주재하는 회의실의 공기는 유난히 무거웠고, 그의 침묵은 때로 천둥보다 더 많은 말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는 완벽한 성주(城主)였습니다. 그의 책상 위 만년필과 결재 서류는 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렬되어 있었고, 그는 그 질서가 성 밖에서도 유지되기를 바랐습니다. 성 안의 모든 길은 그에게로 통해야 했고, 모든 창문은 그의 시선 아래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성벽의 가장 낮은 돌 하나라도 위협할지 모르는 새로운 씨앗을 경계하는 것은 그의 숙명이었습니다.
그의 성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K상무가 온 뒤부터였습니다. K는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의 건강한 웃음소리가 넘쳤고, 그가 내뿜는 생기는 낡고 조용하던 회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K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작은 시장의 가능성을 발견하고는, 소수의 팀원들과 밤을 새워가며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작은 성공은 나비효과가 되어 회사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지요. 모두가 K의 다음 행보를 기대했습니다.
물론 성주도 그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K가 중요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돌아온 날, 모두가 박수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장님은 칭찬 대신, 수백 페이지 보고서의 여백 설정이 통일되지 않은 점과 말미에 찍힌 사소한 오탈자 하나를 지적했습니다. 분위기는 순간 싸늘하게 식었고, 환하게 웃던 K의 얼굴에 옅은 그늘이 지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얼마 후부터 사장님은 K를 건너뛰고 그의 팀원들에게 직접 업무를 지시하기 시작했습니다. K의 가장 유능한 팀원은 ‘인재 육성’이라는 명목으로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습니다. K는 자신의 팀 안에서 서서히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것을 느끼며 고립되었습니다. 사장님이 주재하는 비공식적인 저녁 식사 자리에 K만 빠지는 날이 잦아졌고, 복도에서 마주친 사장님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 미소는 “자네, 아직 내 성안에 있네”라고 말하는 듯하여 더욱 서늘했습니다.
어느 날, 사장님은 모두가 실패를 예견한 신사업을 K에게 맡겼습니다. 이미 경쟁자들이 선점한 시장에, 턱없이 부족한 예산을 쥐여주며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것이 덫임을 알면서도 K는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남은 팀원들을 독려하며 밤낮없이 뛰었지만, 구멍 난 배를 혼자 힘으로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실패의 책임은 오롯이 그의 몫이 되었고, 한때 그를 따르던 동료들의 시선마저 외면하는 것을 그는 견뎌야 했습니다.
그해 가을, K는 소리 없이 회사를 떠나갔습니다. 그의 책상은 너무도 말끔히 비워져,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자리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떠남을 아쉬워하는 것은 그저 몇몇 후배들이 나누는 탕비실의 작은 수군거림뿐이었습니다. 성벽을 넘보려던 푸르던 새싹은 그렇게 흔적도 없이 뽑혀나갔습니다.
세월이 더 흘러 성은 더욱 낡고 고요해졌습니다. 이제 성벽을 위협하는 것은 인간의 열정이 아니었습니다. ‘AI’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안개처럼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AI는 K처럼 상처받지도, 좌절하지도, 감정을 내비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서늘하고 푸른빛을 내는 모니터 위에서, 성의 낡은 구조와 비효율, 그리고 성주가 애써 외면해 온 시장의 냉혹한 변화를 낱낱이 숫자로 보여주었습니다.
사장님은 K를 대할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AI를 대했습니다. 그는 AI가 내놓은 혁신적인 보고서를 ‘데이터는 차갑지. 사람의 마음을 몰라’라며 서랍 깊숙이 던져 넣었고, AI를 업무에 도입하자는 젊은 직원들의 제안을 ‘근본 없는 생각’이라 치부했습니다. 하지만 AI는 K처럼 쓸쓸히 짐을 싸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존재하며, 성주의 판단이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졌는지를 매일, 매시간 증명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쫓아낼 수는 있었지만, 시간을 쫓아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의 성 안에서는 새로운 도전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생기 넘치는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위협을 제거하고 자신의 왕국을 완벽하게 지켜냈지만, 성 안에는 그와 그의 낡은 시간만이 먼지처럼 고여 있을 뿐입니다. 어쩌다 마주치는 그의 굽은 어깨는 지켜낸 권력의 무게 때문인지, 아니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 때문인지 모르게 더 작아 보였습니다.
인연이란 참 덧없는 것입니다. 한때는 저 높은 성벽을 넘어 그와 소통하고 싶었던, 푸른 향기를 지녔던 수많은 인연들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제 그의 성 주위에는 아무도 머물지 않습니다. 그저 무심한 세월과 소리 없는 AI만이, 그 낡은 성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를 지켜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의 성에는, 사람의 온기가 담긴 그 어떤 향기도 더는 남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