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의식

날씨 탓, 그 무지(無知)에 부쳐

by 수요일엔 비
20200614100452539630.jpg 폭염

패션 회사의 책임자라는 이가 실적 보고 자리에서 날씨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 엄포를 놓는단다. 모두 핑계일 뿐이라면서. 참으로 용감한 무지가 아닐 수 없다. 세상만사가 어찌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날씨를 탓하는 것이 핑계라면, 시시각각 변하는 트렌드는 무엇이고 하루가 다르게 부침하는 브랜드의 명운은 또 무엇인가. 대개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은 패션업계의 생리를 모르는 관리나 경영 출신이거나, 설령 현장 출신이라도 본질을 꿰뚫지 못한 얼치기일 가능성이 높다.


날씨가 우리네 삶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는 이미 수많은 사례를 통해 알고 있다. 화창한 날에는 젊은 층이 투표소 대신 놀러 가기에 보수 정당에 유리하고, 궂은날에는 노년층의 참여가 저조해져 진보 정당에 유리하다는 선거의 속설은 단적인 예다. 이처럼 사소해 보이는 하늘의 표정 하나가 거대한 결과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하는데, 하물며 계절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옷의 세계에서는 오죽할까.


한때 4계절이 뚜렷해 금수강산이라 불리던 이 땅은 이제 혹한과 혹서, 가뭄과 폭우가 번갈아 덮치는 극단적인 기후의 실험장이 되었다. 사과의 재배 한계선은 이미 철원을 넘볼 기 세고, 대표적인 한랭 어종이던 명태는 금태(금태란 다른 생선도 있다)가 되었으며, 제주 앞바다에서는 아열대성 어종인 참다랑어가 잡힌다. 우리의 먹거리와 국토의 생태계가 이토록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는데, 유독 패션만이 날씨와 무관하다고 소리치는 것은 눈을 감고 세상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기후의 변화는 단순히 옷의 소재나 두께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온대 전선이 북상하고 아열대 기후가 일상화되면서 사람들의 옷차림은 물론, 먹거리와 생활 습관, 나아가 그 성정(性情)마저 바꾸고 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박봉에 시달리며 일하던 7090 고도성장 시대의 근면함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주 4일제가 논의되고, 140만 명의 청년이 ‘자발적’ 실업 상태에 놓인 시대다. 성공을 향한 아귀다툼 대신, 저마다의 생존과 의미를 모색하는 시대. 십 년 내에 AI가 현존하는 일자리의 80~90%를 대체할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지는, 그야말로 메가톤급 변화의 한복판에 우리는 서 있다.


이런 세상에서 옷은 더 이상 ‘폼나고 멋진’ 과시의 도구일 수 없다. 세상 자체가 더는 폼나고 멋진 낭만으로 가득 차 있지 않기 때문이다. 1차 베이비부머 세대에 이어 X세대로 이어지는 거대한 인구 구조의 파고 속에서 인류는 생존을 고민해야 한다. 영화 <매드맥스> 속 황량한 미래는 더 이상 스크린 속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코앞에 닥친 현실일지 모른다.


불과 30년 전인 1995년까지 산아제한 정책을 폈던 나라가, 이제는 합계 출산율 0.7명 붕괴를 걱정하며 ‘국가 소멸 1순위’로 꼽힌다. 이렇듯 모든 것이 기하급수적으로 변하는 시대에, 옷을 만들고 대하는 이들의 자세 역시 변해야만 한다. 한 번 사서 10년을 입는 옷, 유행을 타지 않는 클래식 같은 허상에 기댈 때가 아니다. 10년을 굳건히 버티는 브랜드는 없다. 만약 있다고 믿는다면, 그 믿음이야말로 시대를 읽지 못하는 ‘꼰대’의 증거일 뿐이다.


결국 이런 혼돈 속에서는 진정성을 가진 브랜드만이 살아남는다. 낡은 성공 공식과 과거의 데이터를 버리고, 지금 시대의 결을 읽어내야 한다. 공부하고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옛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그 방향이 달라졌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찾는다'는 격언은, 모두가 같은 시간에 같은 먹이터로 향하던 시대의 진리였다. 지금은 모두가 잠든 시간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만의 먹이를 찾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금은 혼종(Hybrid)의 시대다. 모든 경계가 녹아내리고 극점이 허물어진다. 시대와 기후,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지 누구보다 빨리 깨우쳐야 한다. 과거의 성공 경험과 지식은 이미 AI의 학습 데이터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며 기계와 공존하기 위해서는, AI가 예측할 수 없는 다른 사고방식과 패턴으로 유영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차려주는 맛있는 찬거리(데이터와 분석)를 받아먹되, 그것을 나만의 독창적인 레시피로 요리해 낼 줄 아는 창의성.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다.


후일담 하나. 그토록 기후와 날씨 이야기를 핑계라며 질색하던 그 성질 급한 분은 어떻게 되었을까. 타고난 금수저 덕에 마이너스의 손을 휘두르며, 선배들이 피땀으로 일군 몇 개의 알짜 브랜드를 담보 삼아 근 40개에 달하는 브랜드 왕국을 운영하는 시늉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주인이 눈을 부라리고 있지만, 정작 조직에는 주인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들만 득세하고, 아랫사람들은 저마다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단다.


오호, 통재라! 변화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자의 말로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실로 통탄할 희극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최근에 들은 가장 재미있는 말이다. "주인의식은 필요 없다, 오로지 주인만 의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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