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졸이는 일
처음엔, 시간이 없었다. 그 다음엔, 체력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의욕이 없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드는 대신 휴대폰을 붙잡은 채 눈만 깜빡이며
하루를 보내게 된 게 그 하루가 일주일이 되고,
그 일주일이 한 계절을 넘겼다. 어느 순간부터는
‘오늘은 뭐라도 해보자’는 다짐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처음엔 마음이 급했다 이러다 진짜 아무것도 안 될 것 같다는 불안감 다들 나를 앞질러가고 있는 것 같은
조급함 그래서 나를 억지로 책상에 붙잡아두었고, 작은 일에도 자책하고, 혼자 늦었다며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그 다짐이 번번이 깨지고 나면, 그 다음엔 슬그머니 무력감이 따라왔다.
이상하게도, 무력감은 처음엔 불편했지만 계속 마주하다 보니 오히려 안정적인 감정이 되었다.
‘어차피 못해’라는 말은 잔인하지만
동시에 그 어떤 책임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력함은 이상할 정도로 달콤했다.
그 아래 숨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면죄부가 생긴다
그리고, 그 면죄부는 결국 습관이 된다.
한동안은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을 감고 ‘오늘은 뭐라도 하자’고 되뇌었다 그러다 눈을 뜨지 않은 채 다시 잠들었다.
한 달 동안 메모장에 쓴 문장은 “내일은 달라져야지”뿐이었다 사람들이 말한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어.”
“의지가 약해서 그래.”
“노력하면 결국 보상받을 거야.”
나는 그 말들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히는, 나에게 해당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오래 걸렸다는 말이다. 어느 날
카페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보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자꾸만 똑같은 방향으로 휘청이는 게 나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청이는 방향, 휘청이는 속도, 휘청이는 하루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살아 있다는 이유로 지쳐버린 밤. 누군가는 그걸 ‘게으름’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우울’이라 말하지만 나는 그 어떤 단어보다 ‘습관’이라는 말이 가까웠다.
무기력은 처음엔 견디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익숙한 구조가 되었다 그 구조 안에서 나는
최소한의 감정만 움직이며 살아간다 감정을 드러내면 피곤하다 욕심을 내면 좌절한다 그러니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로 했다 바라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줄어든다 이게 맞는 걸까, 이게 나인가, 질문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그 질문조차 오래 붙잡고 있을 에너지가 없었다.
요즘은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에도 ‘나는 지금, 뭔가를 겪고 있는 중’이라는 걸
내가 대신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무기력은 게으름이 아니고, 게으름은 악의가 아니고,
악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도 붙여지는 이름일 뿐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앉아
아무 말 없이 하루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무력감 속에서 다음 문장을 떠올릴 힘을 기다리며.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너무 피곤한 날이 있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오후 네 시쯤,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창문을 열어보지만 공기는 똑같고,
배가 고픈 건지 답답한 건지조차 모르겠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지쳐 있다는 신호는
대부분 너무 늦게, 너무 불명확하게 찾아온다.
그럴 땐 물을 천천히 마시고 핸드폰 화면을 3초간 꺼둔다 별 건 아니지만 그 3초 동안 나는
“아직 살아 있구나”라는 사실을 겨우 떠올린다.
예전엔 버킷리스트 같은 걸 적었다.
“혼자 해외여행 가보기.”
“나만의 작업실 갖기.”
“누군가의 기억에 따뜻한 사람으로 남기.”
지금은 그런 목록을 적지 않는다 대신 오늘의 목표는 이것이다
‘해가 지기 전에 물 한 잔은 마시자.’
이게 우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도 계속 살아가는 게 어쩌면 가장 고요하고 단단한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무기력이라는 말은 얼핏 모든 의지를 내려놓은 상태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아주 작은 저항들이 \숨겨져 있다 쓰레기통에 물병 하나를 버리는 일, 세수를 하기 위해 세면대 앞에 선 나를 보는 일, 그런 사소한 일들이 내일을 만든다 어떤 날은, 창밖에 비가 온다 내가 하지 않은 일들이 쌓이는 소리 같다.
그럴 땐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쯤 와 있니?”
대답은 없다. 하지만 그 질문을 매일 되풀이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딘가를 걷고 있는 기분이 든다.
멈춰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 안의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다는 걸, 비어 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도 무언가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는 걸 믿어보기로 한다.
누구는 그걸 회복이라 부르고
누구는 그걸 인내라 부를 테지만 나는 그냥 이 과정을 ‘살아남기’라고 부른다.
그리고 오늘,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무너진 나를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기분이 든다.
그게 어쩌면 처음으로 내게 하는 작은 응원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