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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슝이모 Jun 19. 2022

왜 선생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못하니!

태국 학생들의 한국어 발음 교정 고군분투기

 1.

“여러분, ‘싸다’가 아니라 ‘사다’ 예요. 다시 선생님 따라 하세요. 사다.”

“싸다.”

“아니 아니. ‘싸다’이 아니라 ‘사다!’”

"싸다!"

이쯤 되면 울고 싶어 진다.

요즘 나는 태국 학생들과 한국어 발음으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사투를 벌이고 있다.

자음 모음을 처음 배우는 단계의 4학년(고1) 학생들은 물론이거니와 2년간 한국어를 공부해온 6학년(고3) 학생들도 한국어 발음 앞에선 여전히 골머리를 앓는다.


가장 학생들을 괴롭히는 자음은 ㅅ과 ㅈ, ㅊ, 그리고 전혀 되지 않는 ㄹ 받침이다.

요즘 한창 배우고 있는 단어 ‘사다’를 학생들 입으로는 영영 듣지 못하는 건 아닌지 슬슬 겁이 나기까지 한다.

‘싸다’로 발음하면 뜻이 완전히 달라지니 ‘사다’로 발음하라고 매 수업마다 주의를 시키고 개인별로 연습시켜 보지만 불가항력 수준.

어느 날엔가는 불현듯 ‘내가 ‘바담 풍’으로 말하면서 학생들이 ‘바람 풍’으로 말하는 꼴이 아닌가라는 두려움이 엄습해 내 발음을 녹음해서 들어보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알게 된 사실은 태국어 자음에는 한글의 ㅅ과 ㅈ에 대응하는 자음이 없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한글 자음 모음의 발음을 배울 때 그에 대응하는 태국어 자음 모음을 옆에 적어두면서 공부하는데 ㅅ과 ㅈ을 대체할 태국어 자음이 없으니 학생들이 고르는 건 태국에 있는 자음 ㅆ과 ㅉ이다.

우리가 영어를 처음 배우던 시절 f와 P 발음 옆에 한국어로 음가를 ‘프’로 똑같이 쓸 수밖에 없어 발음할 때 둘 다 같은 ‘프’ 발음이 나왔던 그 이치다.

그러니 모국어에 없는 발음을 제대로 발화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나는 아마 꽤 오랫동안 이 아이들의 ‘썬쌩님’이 되어 ‘쩌는 쩡말 남짜친구 없어요’라는 말을 듣게 될 것 같다.

      

2.

요즘 나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 또 하나의 발음은 ‘ㄹ 받침’이다.

태국에 오기 전, 잠시 태국어를 공부했는데 태국어에 우리의 ㄹ 발음에 해당하는 자음으로 r(알)과 l(엘) 발음이 나는 자음이 각각 하나씩 있다는 걸 알고 태국 사람들은 ㄹ 발음하기에 유리하겠구나 했다.

그런데 웬걸.

내가 학생들에게 “물을[무를] 마시다”를 따라 하라고 하자 학생들 모두가, 정말 모두가 “[무른] 마시다”라고 발화를 하는 거다.

학생 전부의 발음이 이렇다니!

이때 나는 또다시 내 발음을 의심했다.

아니면 쓰고 있는 마스크가 내 발음을 뭉개 버렸나.


태국인 한국어 교사에게 내 리을 받침 고충을 토로하자 그녀가 알려준 사실은 태국 사람들은 리을을 받침으로 쓰는 단어가 없다는 거였다.

그러니 혀가 굳어진 나이에 생소한 발음을 배우는 게 매우 힘든 일이니 잘 이해해달라고 한다.

난 “네, 그럴게요.”라고 대답은 했지만, 나? 아직은 포기가 이른 신참 교사.

오늘도 수업시간에 여전히 학생들에게 기습적으로 ‘물을’을 발음시키고 그 친구가 제대로 발음할 때까지 말하게 한다.

아직까지는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싸움이긴 하지만.

내 모국어에 없는 발음을 공부한다는 게 얼마나 혀를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인지를 나는 요즘 태국 학생들을 보며 뼈저리게 체험하는 중이다.

고생스럽지만 조금만 더 노력해보자, 얘들아!


3.

발음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

오래전, 캄보디아에 살던 때의 일이다.

그 당시는 내가 한국어 교원이 되는 공부를 시작하기 훨씬 전이었다.

어느 날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던 한 캄보디아 친구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내가 ‘자동차’를 말할 때 ‘자’와 ‘여자’를 말할 때 ‘자’가 발음이 다르니 그 발음을 각각 어떻게 내는지 알려달라는 거다.

난 그 친구에게 내가 그 ‘자’들을 다르게 발음했을 리 없다며 네가 잘못 들은 거 같다고 우겼다.

그 친구는 난처해진 얼굴로 “아니야, 네가 발음할 때 두 ‘자’는 정말 달라. 난 네가 같은 글자를 어떻게 그렇게 다르게 발음하는지 알고 싶을 뿐이야.”라는 말만 되풀이했고, 나는 끝끝내 그 친구의 의문을 해결하지도 심지어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 당시 발음 사건 해결의 실마리는 내가 한국어 교원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한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고기를 말할 때 ‘코기’에 가까운 발화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한국어에는 무성음(성대의 울림이 없는 소리)과 유성음(성대의 울림이 있는 소리)이라는 개념이 없는 이유이다.

자음 ㄱ, ㄷ, ㅂ, ㅈ이 어두에 오게 되면 ‘k, t p, tʃ’와 같은 무성음으로 발음이 되고 유성음과 유성음 사이(ㄴ, ㄹ, ㅁ, ㅇ, 모음)에 위치하면 유성음화 되어 g, d, b, z로 발음된다.

그래서 ‘고기’를 말할 때 앞에 고에 쓰인 ㄱ은 k 발음으로, 기의 ㄱ은 g로 발화된다.

우리는 바보를 ‘파보’로, 구두는 ‘쿠두’로 발음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 캄보디아 친구에게 자동차의 자는 ‘tʃ’ 발음에 가깝고 여자의 자는 영어 발음 ‘dʒ’ 발음에 가깝다고 말했어야 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며칠 전 태국인 한국어 교사의 수업을 참관하면서 하게 되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한국어 단어를 가르칠 때 단어 옆에 태국어로 발음 음가를 적게 했는데 그러던 중 나온 단어, ‘자주’가 내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자주’의 '자'는 태국어 발음 ‘차’로, ‘주’는 태국어 발음 ‘쭈’로 적게 하고 있었다.

'자'의 ㅈ은 무성음화로 인해 ㅊ(tʃ)로, 유성음화 되는 '주'의 ㅈ은 태국어 자음에는 없는 발음이니 그에 가장 가까운 발음인 ㅉ로 가르치는 거다.


수업이 끝난 후 난 그녀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펜 선생님, 내가 ‘자주’라고 발음할 때 두 개의 지읒 발음이 정말 달라요?”

“네, 왜요?”

“음...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은요, ‘자주’를 발음할 때 두 발음이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발음하는 건 아니라서요.”


한국어 발음, 이 이상하고 오묘한 세계의 문을 학생들은 이제야 열었을 뿐이다.

앞으로 글자와 발음이 다른 무궁무진한 한국어 단어들을 가르칠 생각에 아찔하면서도 미안하다.


그래도 얘들아, 너희들은 성조가 무려 다섯 개나 있는 매우 어려운 발음 체계 보유국 국민 들인 만큼 이 한국어 발음의 난관을 잘 헤쳐나갈 거라고 이 썬쌩님은 믿는다!  

    

4.

“다음 달에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있어요. 처음에는 지역 예선을 치르게 되고 거기에서 우승을 해야 태국 전국 본선 대회에 출전할 수 있어요.”

펜 선생님은 매해 태국 내에서 열리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우리 학교가 매번 전국 본선 대회에 출전했고 본선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어 왔다고 설명한다.

올해에는 꼭 지역 예선에서 1등으로 본선에 올라가야 한다며 나에게 겁을 준다.

학생들의 말하기 대회 성과는 전적으로 한국 원어민 선생님의 능력에 달렸다는 걸 넌지시 암시하면서.


말하기 대회 공지문을 보니 학교별로 스토리텔링 부분에서 한 팀 3명, 뉴스 부분에서 한 팀에 2명씩 꾸려야 하고 심사 대상은 발표 내용과 구사하는 발음, 사용하는 단어, 몸짓 등이다.

원어민 교사인 내게 참가할 학생들 선발부터 발표 대본 작성 및 학생들 연습을 시켜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떨어졌다.


부랴부랴 5, 6학년 학생들 중 한국어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골라서 책에 나온 글 중 태국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발음인 ㅅ, ㅈ과 ㄹ받침, 이중모음 발음이 고루 들어있는 문장을 읽게 했다.

그리하여 발음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교정이 가능할 것 같은 학생들 5명이 추려졌다.

6학년 해수, 문아, 소원, 혜성, 그리고 5학년 천사가 우리 학교의 어벤저스 팀이다.


5학년임에도 당당하게 6학년들과 함께 대회 출전팀으로 선발된 천사가 쉬는 시간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저 정말 열심히 할 거예요. 저는 한국어가 너무 좋아요. 제가 사는 동네는 여기 차층사오가 아니라 멀리 떨어진 외곽에 있어요. 그런데 제가 사는 동네에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고등학교가 없어요.

그래서 한국어과가 있는 이 학교로 멀리에서부터 찾아온 거예요.”

조용한 성격의 천사가 나를 찾아와 눈을 반짝이며 하는 말의 울림에 감격한 나, 울컥했다.

자칫 넘을 뻔한 울컥 임계점에서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천사의 손을 꼭 잡았다.

“네가 한국어를 좋아해 주니 선생님은 참 기뻐. 천사야, 우리 진짜 열심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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