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학교에서 첫 월급을 탔습니다.
1.
태국에 오기 전 일이다.
나이 삼십 이후로 대부분 외국을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고 있다 보니 한국에 나만의 집이 있을 리가...
형편이 이러하니 한국에서 지낼 때는 부모님 집에서 기거하는 캥거루족이 된다.
이번 태국행을 앞두고 엄마에게 내 통장과 도장들을 맡길 겸 엄마의 소중한 것들(예를 들어 집 계약서, 친인척 주소록, 딸들 어린 시절에 부모님께 쓴 편지, 일찍이 세상 떠나신 외할머니 사진 등등)이 들어있는 옷장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최근에 서랍 속에서 뭔가를 찾으셨는지 내용물들이 흐트러져 있길래 정리를 하다가 누렇게 바랜 봉투 몇 장을 발견했다.
아, 아빠의 월급봉투였다. 40년 이상의 세월을 품은 낡고 늙은 월급봉투.
월급봉투에 적힌 월급액은 지금으로써는 말도 안 되는 적은 금액이었다.
지금과 물가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월급액은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 생계를 위해 늦은 퇴근을 일삼았던 아빠의 땀과, 그 땀의 의미를 알기에 이 봉투만은 쉬이 버리지 못한 엄마의 살뜰한 마음이 누런 봉투에 담겨 있었다.
나를 먹이고 입히고 키워온 월급봉투를 들고 있으니 손끝이 저릿해졌다.
지금의 나, 저 혼자 잘나서 큰 게 아니라는 걸 늘 기억하라고, 그러하기에 어디에서나 겸손한 삶의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그리고 어디에서나 씩씩하게 잘 살아야 한다고 아빠의 월급봉투가 나지막이 말하고 있었다.
태국행을 앞두고 있었던 탓인지 아빠의 오랜 월급봉투가 전하는 말이 절절하게 가슴에 꽂혔다.
살가운 표현이 어색한 딸로 평생을 살아온 탓에 부모님 앞에서는 차마 하지 못한 말.
잘 지낼게요. 어디에서나 겸손하게 씩씩하게.
새로운 타향살이를 앞두고 잘 지내겠다는 결심에 오래된 아빠의 월급봉투가 한몫을 했다.
2.
태국 학교에서 첫 월급을 받았다.
현금이 가지런히 들어있는 월급봉투 겉에는 내 영문 이름이 쓰여있다.
동전까지 셈이 되어 짤그랑거리는 봉투를 받아 드니 기분마저 짤랑짤랑 신이 났다.
일을 시작 한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받은 월급이라 온전한 한 달치 월급이 아니지만 아무렴 어때.
태국에서 흘린 나의 땀이 봉투 속에 가지런히 담겨 되돌아왔다는 생각에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내 첫 월급봉투 위로 태국으로 오기 전 발견했던 아빠의 오랜 월급봉투가 겹쳐 보였다.
아빠의 월급봉투가 키운 저, 이렇게 잘 지내고 있어요.
3.
현금이 든 월급봉투를 받아본 적이 있던가.
내 생애 첫 월급을 받았던 때는 밀레니엄 이전 시대이었음에도 그땐 이미 계좌 이체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었다.
돈이 은행거래로만 이루어지니 월급을 받았다는 기분은 현금을 받아 들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으리라.
한국에서 받는 월급은 '받는다'가 아닌 '입금되었다'로 정정되어야 할 여지가 있다.
받는다는 건, 누군가의 손에서 내 손으로 직접 전해져야 받는다는 느낌이 훨씬 사는 것만 같다.
그래서인가. 나는 이 태국에서 받은 월급이야말로 이제야 제대로 된 월급을 받은 느낌이다.
들뜬 기분으로 현금이 든 월급봉투를 조몰락조몰락 만지면서 첫 월급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을 했다.
우선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자.
첫 월급으로 스타벅스 커피를 마신다니, 스타벅스 가는 일이 대수롭지 않은 일인 한국에서는 이게 뭔 소린가 싶겠다.
내가 사는 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스타벅스를 가기 위해서는 썽태우와 버스를 번갈아 타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게다가 이 동네에서 커피값이 가장 비싸다. 우리 동네의 에어컨 나오는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가 비싸다고 하는 곳이 60밧 정도(2천2백 원)이고 내가 점심때마다 사 먹는 맛난 커피가 30밧(천백 원)인데 태국의 스타벅스 가격은 한국과 비슷하다.
그러니 내가 사는 곳에서 스타벅스를 가는 일은 비용과 가는 수고를 고려한다면 매우 대수로운 일이다.
월급 받고 기분을 내러 가는 그런 대수로운 곳이 바로 이곳 차층사오의 스타벅스다.
4.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돌아오는 길, 첫 월급의 기분을 좀 더 내려고 세븐일레븐에 들렀다.
태국 사람들이 ‘세븐’이라고 부르는 세븐일레븐은 태국 편의점의 대명사라고 해도 될 정도로 태국을 평정했다.
태국 구석구석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곳이 세븐일레븐이다.
태국에서 사는 외국인에게 세븐일레븐은 천국이다.
없는 게 없다.
나의 저녁식사는 집 옆 세븐일레븐의 밀키트가 대부분이다.
세븐일레븐이 너무 가까이 위치하니 밥 하기 귀찮아서 저녁을 거른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
덕분에 태국에 온 이후로 하루 칼로리 섭취량이 한국에서보다 더 커졌다.
퇴근 길 세븐일레븐 안의 밀 키트 냉장고 앞에 코를 박고 오늘은 어떤 음식을 사 먹을까 고민하는 것이 하루의 큰 낙 중 하나이다.
세븐일레븐의 냉동된 밀키트들은 그 종류가 다양하고 맛 또한 깜짝 놀랄 만큼 맛나다.
다만 밥양이 적고 배가 금방 꺼지는 찰기없는 월남미 쌀밥이다 보니 한끼에 두 그릇을 먹는 일이 발생한다는 게 단점이랄까.
월급을 탄 오늘은 내가 먹을 수 있는 종류로 다 골라봤다.(플렉스~)
게살볶음밥, 새우볶음밥, 계란볶음밥, 새우오믈렛 덮밥, 연어덮밥, 고등어덮밥. 그리고 두부김치찌개.
이렇게 사고도 한국돈 만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이러니 천국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나.
세븐은 해븐이다.
숙소로 돌아와 하루 내내 흠뻑 흘린 땀을 씻어내고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맛난 세븐일레븐 연어덮밥에 태국 맥주 싱하를 곁들이면서 발코니 너머로 붉어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본다.
현금이 든 월급봉투, 남이 한 밥에 시원한 맥주 한잔, 그리고 저녁노을.
나 지금 취한 건가. 행복에 겨운 건가.
슬금슬금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