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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슝이모 May 22. 2022

이 맛에 '선생님'을 하는 건가봐

한국어에 진심인 태국 학생들

1.

아침, 일어나니 배가 묵직하다.   

이런. 생리가 시작되었다. 생리대까지 장착하고 찜통 교실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내일이면 주말인데. 내 몸아, 하루만 더 기다려주지 그랬니...   

진통제 두 알을 와락 삼키고 태국 생활 첫 주의 마지막 출근 준비를 했다. 


이제는 첫날처럼 차로 출근하는 호사는 없다. 걸어서 출근해야 한다.   

그래봤자 15분이지만 학교 교무실에 도착하면 이미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져 마스크마저 흐물거린다.   

교무실에 도착하니 나보다 늘 먼저 와 있던 내 옆자리 펜 선생님이 오늘은 안 보인다. 펜 선생님은 금요일마다 당번을 선다. 당번 선생님은 아침 7시 전에 출근해서 1시간 내내 학교 교문에 서서 등교하는 학생 지도를 한다고 한다. 


아침 조회시간에 매번 펜 선생님이 함께 있어 줘서 몰랐는데 혼자 교사들 무리 옆에 서 있으니 뻘쭘하다.  

태국 교사들은 친절하기는 해도 외국인에게 살갑게 먼저 와서 인사하지 않는다.  

외로와지고 있는 찰라, 저쪽에 홀로 서 있는 일본 원어민 교사가 보여 그녀를 불러서 같이 서 있자고 했다. 

암, 외로운 외국인은 끼리끼리 챙겨줘야 하는 법이지.


아침 조회가 끝나고 교무실로 들어오면 대략 8시 10분인데 오늘은 교장 선생님의 길었던 훈화 말씀에 8시 20분, 이미 1교시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다. 

1교시 수업이 있는 선생님들을 관찰하니 여유를 부리며 8시 30분경에 교실로 향한다. 이런 여유도 배워야 할까. 살짝 고민해본다. 


2.

한국어 전공반 수업에 들어갔을 때야 비로소 교사의 희열이란 것을 맛보았다. 

학생들은 교실로 들어오는 나를 향해 너나 할 것 없이 “안녕하세요!” 또박또박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뒤에 앉은 아이들은 일어나 두 손을 마구 흔들며 인사를 한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망울만 봐도 내 말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는지 알겠다.  

내 질문에 학생들의 네, 아니요 대답이 쩌렁쩌렁 교실을 흔든다.  

가장 발랄할 나이인 4학년(고1)은 쉬는 시간이 되니 내 주위에 몰려와 이것저것 질문을 하고 어떤 학생들은 태블릿pc에 “선생님, 왜 이렇게 귀여워요?”라고 직접 써서 보여주기까지 한다. 

한국어 공부에 진심인 학생과 관심 없는 학생의 수업 태도 차이는 가히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4학년(고1) 전공반 아이들은 처음 한국어 수업을 듣는 것인데도 한국어에 관심이 있어서 반을 선택한 학생들인 만큼 한글을 읽을 줄 아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학생들의 반 이상이 이미 한국 이름을 스스로 만들어서 가지고 있어서 아직 한국 이름이 없는 학생들에게만 이름을 만들어주었다. 

학생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이름을 보면 한국 아이돌 이름을 따라 만든 이름이 많지만 누가 왜 이런 이름을 만들었을까 싶은 특이한 한국 이름들도 눈에 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만자(구세대식 이름), 절민(철민을 잘못 쓴 걸까), 부예나(한국에서도 희귀한 부씨!), 도알(무슨 뜻일까?), 헤렁(혜령을 잘못 쓴 건 아닐까), 헤조(혜조가 아닐까), 그리고 외국 이름이라 유추되는 유키, 케이조, 갈리아.

출석 부를 때 미소가 지어지는 이름, 선물, 포도, 만월, 진선미, 잎새, 아지, 버터, 수란, 당근이와 같이 귀여운 이름도 있다.

어떤 반에는 ‘문아’와 ‘무나’가 같이 있어서 이름 부를 때 조심해야 한다.

자신과 어울리는 이름을 한 아이들도 있다.   

인형이는 정말 인형처럼 깜찍하게 행동하고 나비는 몸이 가날퍼 정말로 날아다닐 것 같다.  

엄지는 키가 작고, 공주는 머리 모양에 세심한 신경을 쓴 것이 역력하다. 대성이는 짧은 커트 머리를 한 운동선수가 되고 싶은 아이다. 


마스크 뒤에 가려진 학생들의 얼굴을 보지 못해 답답하기만 하다. 학생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이름과 함께 또렷이 기억하고 싶은데. 학생들의 얼굴을 온전히 볼 수 있는 날이 언제 오려나.   

   

3. 

5학년(고2)과 6학년(3) 학생들은 첫 수업 시간에 직접 자기소개를 했다. 말하기와 쓰기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자신을 소개하는 글을 종이에 쓴 후 앞에 나와 발표를 시켰다. 

학생들이 쓸 내용에 대한 예문은 미리 칠판에 적어주었다.


1. 이름 2. 형제자매 3. 취미 4. 꿈 5. 좋아하는 것


5학년의 경우에는 내가 학생들의 얼굴을 알 수 있도록 종이 뒤에는 자기 얼굴을 그려달라고 했다. 


자기 소개서를 쓰는 학생들에게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휴대폰과 태블릿 PC을 동원해 번역기를 돌리거나 교과서를 뒤져 단어들을 찾았고 한국어를 잘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으러 돌아다니기도 했다.  

어떤 학생들은 내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내게 도움을 요청할 때 한국어가 되지 않는 친구들은 “선생님은 제가 엄격하게 썼는지 확인을 해주셔야 합니다.” 구글번역기로 어색하게 번역된 문장을 먼저 보여주고 자신이 쓴 글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번역기로 학생들과 대화를 하다니, 세상이 이렇게 변했다. 


발표는 언제 어디서나 떨리는 일인가보다.  

발표할 종이를 든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아이들에게는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힘을 실어주었다. 

취미에는 음악듣기, 영화보기, 한국 드라마보기가 대부분이다. 좋아하는 것에는 예상한 대로 한국 아이돌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 꿈을 소개하는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는데 다양했다. 

의사, 변호사, 배우, 모델, 축구선수, 영화감독, 그래픽 디자이너, 스타일리스트, 건축가, 사업가, 승무원, 여행가이드, 부자(!), 한국어 선생님, 통역사, 심지어 우주비행사도 있다!

한국어 선생님과 통역사가 되고 싶다는 학생들의 이름에는 별표로 표시해두었다. 특별 관리에 들어가야 할 것 같으니까.     


자기 얼굴을 그려달라는 요청에 다양한 얼굴들이 나왔다.

그림 솜씨가 제각각이지만 대부분 포인트를 잘 잡아 그림을 그렸다. 정말 닮았을 것 같은 얼굴들이다. 

학생들이 글씨를 어찌나 예쁘게 잘 쓰는지. 악필로 굳혀진 내 글씨체가 민망해진다. 

어떤 학생들은 종이에 잘 부탁한다던가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말을 적기도 했고 심지어 내게 사랑 고백도 적었다. 으윽, 내 심장이 쿵쾅 요동을 친다.      


펜 선생님은 수업 시작 전 내게 악역을 부탁했다. 자신은 도저히 무서운 선생님이 될 수 없다면서. 

이거 곤란한데.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학생들에게 어떻게 엄한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학생들이 칠판에 적은 한국 이름
나도 잘 부탁해 얘들아!!!


    

마스크 뒤에 가려진 얼굴들이다. 아 정말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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