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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슝이모 May 30. 2022

선생님의 흑심

태국의 삶에 스며들다

1.

초보 교사의 가장 큰 비애는 수업 준비가 충분히 안 되어 있다는 점이다.   

기존에 수업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수업에 쓸 자료가 있을 리 만무하다. 다음 날 수업에서 쓸 PPT에, 미디어 등을 이용한 활동 준비에, 유인물과 숙제 준비 등등 매일 떨어지는 발등의 불을 끄느라 태국의 밤이 짧고도 짧다.   

마음만 준비하면 될 줄 알았는데 겁 없이 뛰어든 초보 교사에게 고생문이 열렸다. 갑자기 자유로로 내몰린 초보운전자의 오줌을 지릴 것만 같은 그 긴장감이 초보 교사에게도 있다.


학교에서 내게 할당해준 반은 총 7개 반으로 고등학교 1, 2, 3학년에 각각 한국어 전공반과 교양반이 있고 한국어 동아리도 있다. 7개의 반이 모두 다른 진도와 수준에 교재도 제각각이다.   

한국어 교양반에는 태국인 한국어 교사가 함께 팀티칭을 한다고 하기에 반씩 나눠서 수업하는 줄 알고 한시름 놓으려 했는데, 웬걸. 태국인 교사 펜 선생님은 수업 보조로 들어와서 수업에 통역이 절실하게, 정말 절실해서 내가 ‘펜 선생님! 도와주세요’하고 애절하게 부를 때만 도움을 줄 뿐 수업을 준비하고 이끄는 사람은 나다.   

게다가 학교에선 수업 방식을 칠판에 판서하는 전통적 방식보다는 PPT를 활용하도록 권유한다.  

다시 말해, 내가 준비해야 할 PPT는 7개 반을 위한 7가지.

학교 측에선 한국어 교실의 고장 난 에어컨은 몇 달간 내버려 두면서도 빔프로젝터는 고장 나기 무섭게 재깍 고쳐놓는다.

그 덕에 밤잠 줄여가며 PPT를 만드는 PPT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어. 그런데 내가 좀 이상하다.

이런 상황이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짜증이 나지 않는다.  

태국에 온 이후로 생긴 증상이랄까. 입에 달고 살던 말, “아, 짜증 나.”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2.

태국으로 오기 전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 제법 오랜 기간 살아본 경험이 있다.   

두 나라 모두 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경제 규모 순위가 태국보다 훨씬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국경만 건너도 바로 여기가 태국이구나 체감이 들 정도로 국가들 사이의 경제 수준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타국에서 터를 잡고 살다 보면 그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닮기 마련이다. 태국의 넉넉함이 부러울 법도 한데 부럽다는 표현은 좀처럼 하지 않는 두 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나에게도 작용했었을 거다.

그래서인지 나는 태국을 대할 때면 젠체하는 나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부자인 이웃사촌이 부러우면서도 부러워하면 지는 것 같아 그런 이미지를 만들었을 테다.

태국의 삶 속으로 들어와서 느끼고 있다. 태국을 바라볼 때면 작동되던 젠체 필터가 벗겨졌다는 것을.

사람도 건물도 심지어 공원을 활보하는 고양이와 오리도 젠체하지 않고 제 자리에서 제 삶을 산다. 실은 태국 사람은 젠체할 필요가 없는 거다.

생활 면면이 스며있는 여유와 마음의 넉넉함이 있을 뿐이다.

태국에서는 부러우면 지는 게 아니라 조급하면 지는 거다.


우리 동네 공원을 산책하면서 만난 풍경. 여유롭게 흐르는 저녁의 시간 속에서 태국의 삶을 느낀다.


    

3.

아침, 출근길을 나섰다. 나를 씹어먹을 것 같은 아침 해가 부담스러워 손풍기를 꺼내고 있는데 저 앞 오토바이 택시 아저씨가 손을 흔든다.  

보통 출근은 걸어서 하는데 15분가량 걷는 길이라 부담 없다는 생각으로 걸어 다녔지만 오늘은 1교시 수업이 있는 날이라 땀 식힐 시간도 필요하고 하니 오토바이 택시를 타야겠다.

마스크를 낀 내가 외국인인지 태국인인지 알 길이 없어 아저씨는 자연스럽게 태국말로 말한다.  

뭔가 길게 말을 꺼내시는데 그 중엔 어디 가요?라는 말도 있겠지 싶어 롱리안 닷다루니 카(닷다루니 학교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아는 말 한마디 더. 타오라이 카?(얼마예요?)

이쯤 되면 태국인이 아님이 금세 탄로가 난다. 그 어렵다는 태국의 성조는 도통 입에 붙지가 않는다. 글로 쓰는 ‘타오라이 카’와 말로 하는 ‘타오라이 카’는 성조가 있는 태국에서는 천양지차이다.

아저씨, 내 어눌한 성조에 눈치채신 양 손가락 2개를 펴면서 답하신다.

이십 밧(한국 돈 7백 원 정도).

흥정도 필요 없다. 태국인에게도 그만큼 받으니까.

오토바이 택시에 매달려 가는 출근길, 아침 햇살에 달궈진 바람인데도 상쾌하기만 하다. 운동이라 생각하고 출근길을 걸어 다니려 했는데, 뭐 까짓 운동쯤이야 퇴근 후에 하면 되지. 이제부터 출근길은 오토바이 택시다!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다른 날보다 좀 더 일찍 학교에 도착하니 정문에는 학생 지도교사들이 서 있다.  

보통 내가 출근할 때는 늘 운동장 아침 조회 바로 직전이어서 지도 교사들을 볼 수 없었다.  

학생들은 지도 교사 앞에 잠시 멈춰 서서 가방을 내려놓고는 손을 모아 하는 태국식 인사(와이)를 하며 동시에 무릎을 살짝 굽힌다.  

그 모습이 마치 가벼운 율동처럼 참 고와서 저만치 떨어져 바라보고 있는데 등교를 재촉하며 운동장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가 심상치 않다.

어라, 아는 노랜데.  

어, 어, 어! 쿨의 아로하다.

반가운 한국 노래, 그것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노래 아로하를 학교가 등교 음악으로 선정해서 틀어주다니.

아로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운동장에서 학생들의 고운 인사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침부터 굉장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가슴이 일렁인다. 누가 말이라도 시켰으면 울컥했을지도 모르겠다.     


4.

태국 고3들도 공부 압박에 지쳐있기는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고3 수업에 들어가면 학생들은 온몸으로 ‘나 고3이에요’를 말하고 있다.  책상에 엎드려 있는 학생들, 눈이 반쯤 감겨 턱을 괴고 있는 학생들.

고1 학생들이 보여주는 왕성한 생기는 좀체 찾기가 힘들다. 학생들에게 어제 몇 시에 잤는지 물으니 1시, 2시라는 대답이 나와 깜짝 놀랐다.

피곤할 만도 하지.  그렇다면 이 선생님이 좀 동적인 수업으로 너희를 깨워줘야겠구나.

수업 첫 시작을 전화번호와 생일을 말하는 연습을 시켰다.

그 전날 숙제로 전화번호와 생일을 한글로 적는 쓰기 숙제를 냈었으니 그 연장 선상에서 이번에는 말하기 연습이다.

예고 없이 한 명씩 호명하며 생일이 언제예요, 전화번호가 뭐예요 물으니 놀란 학생들은 웅성웅성 앞 옆 뒤 친구들에게 읽는 방법을 배워 자기 차례가 되기 전까지 열심히 연습한다.

얘들아, 선생님이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야.

그다음 혜린이를 호명하고는 언니가 있는지 물었다.

네, 대답에 언니 생일이 언제예요?라고 질문을 바꾸니 혜린이의 동공은 마구 흔들리고 다른 학생들이 괴성을 지른다.

그다음은 어머니 전화번호를, 그다음 학생은 옆의 친구 전화번호를 물으니 학생들은 자기 전화번호와 생일 음가를 태국어로 적은 공책을 책상 위에 던져두고 자포자기한 듯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그다음 차례는 반장이다.

우리 학교에서 반장은 학생들의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공부 성적과는 무관하게 반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순위로 뽑힌다.

반장 사랑이는 이미 수차례 진행되었던 내 기습 질문에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모르면 모른다고 알면 목청 크게 말하는 당찬 아이다.

태국 학생들 대부분이 모르는 답 앞에서 쭈뼛거리며 수줍어지는데 이 아이는 좀 맹랑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 아이들 잠도 깨울 겸 사랑이에게 남자 친구 전화번호가 뭐예요?라고 물었다.

남자 친구라는 단어는 아주 잘 아는 학생들은 어머어머 소리를 지르며 우리들은 남자 친구 없어요~라고 손사래를 치는데 사랑이 이 녀석, 내 질문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제  남자 친구의 전화번호는 영육삼 xxx xxx입니다, 답을 한다.

사랑이의 대답에 여기저기서 친구들이 너 남자 친구 있었어? 묻고 난리가 났다. 사랑이는 물으니 대답한 건데 뭐.라는 몸짓을 취하며 자리에 앉는다.

사랑이의 당돌함에 나도 한참 웃었다. 참 재미난 친구다.      


40명이 넘는 학생들이 앉아있는 교실에서 마스크를 낀 학생들이 하는 대답이 잘 들릴 리 만무하다. 언어를 공부하는 수업에서 학생들의 말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니 학생들에게도 나에게도 너무 가혹하다. 그래서 나는 교실 앞 뒤 옆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학생들 입 앞으로 마이크를 가져다 댄다. 이 방법은 뒷자리에 앉아 딴짓하는 아이들에게 주의를 시키기에도 제격이다. 학창 시절 뒷자리 단골이었던 내 과거를 떠올려보자.

수업 시간 뒷자리에서 몰래 읽었던 하이틴 로맨스와 강경옥 만화책이 몇 권이었나를 생각해보면 뒷자리 학생들을 경계할 만도 하지.

한국어 원어민 교사이라면 학생들의 말하고 듣기 실력 향상이 가장 큰 의무이자 목표인 법. 찜통 교실에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면서 학생들에게 말하기를 시키는 2시간짜리 연강 수업을 하고 교실에서 나올 때는 머리를 막 감고 나온 사람처럼 머릿속까지 온통 땀에 젖어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지.

이러한 더위와 땀이 짜증 날 법도 한데 짜증이 나지 않는다.      


고3 학생들에게는 고3이라는 이유로 각별히 관심이 간다.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성적도 신경이 쓰이고 한 명 한 명의 고충과 고민이 무엇인지 꿈이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마스크 뒤에 가려진 얼굴은 더더욱 궁금하다.

각 이름이 가진 얼굴을 알기가 힘들다면 그 이름이 가진 목소리라도 제대로 알고 싶어 진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그렇지! 목소리를 녹음해서 제출하는 숙제를 이용하면 되겠다.

게다가 개별적으로 학생들과 채팅도 할 수 있겠다는 선생님의 흑심이다. 이 읽기 숙제는 학생들 읽기 연습도 시키고 녹음파일에 따라 발음 교정도 해줄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학생들에게 한 문단의 글을 나눠주고는 읽는 것을 녹음해서 내게 개인적으로 보내라고 했다. 직접 글을 여유 있게 읽어보니 30초 정도 되는 것 같아 학생들에게 30초 이내로 읽는 것을 목표로 하고 적어도 1분 안에 읽어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숙제 제출을 SNS 라인(태국에선 주로 라인을 쓴다)으로 3일 후 밤 12시 전까지 제출하라고 했다.      

역시 한국어 에이스들은 숙제를 낸 당일 저녁에 바로 숙제를 라인으로 보내왔다. 해수는 발음이 정확하고 목소리도 안정적이라 한귀에(!) 반해버렸다. 태국에서 매해 열리는 전국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 출전할 선수 0순위는 해수, 너다.

고 3 학생들이 밤늦게까지 깨어있다는 게 사실이라는 걸 라인으로 숙제 보내는 시간을 보면서 알았다.

라인 알림음을 무음으로 하지 않고 잠들었다가 늦은 밤부터 새벽 내내 띠링띠링 울리는 라인 알림 소리에 잠을 설쳤다.

이번 휴일 내게 주어진 숙제는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발음을 듣고 각각 잘되는 발음과 안 되는 발음을 찾아 적 어두 기다. 다음 수업 시간에는 개별적으로 안 되는 발음을 알려줘야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숙제를 보내는 라인이 띠링띠링 울린다.

학생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목소리 뒤에 배경 음악처럼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압력밥솥이 치직치직 뿜어내는 소리, 사람들이 소곤대는 소리들이 숨어있다.

그리고 한 아이의 목소리 너머에서 귀뚜라미가 운다.

학생들의 삶이 내 공간 안에 소리로 들어온다.

이렇게 나는 우리 학교에 우리 학생들에게 스며들고 있다. 시나브로, 시나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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