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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슝이모 May 21. 2022

나는 어디? 여긴 누구?

좌충우돌 태국의 한국어 수업 첫날

1.

나로 말하자면 여중, 여고, 여대를 나온, 다소 균형이 어그러지고 밋밋한 과거사의 소유자다. 내가 태국에서 파견된 학교가 여학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필시 팔자라는 것이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남녀공학에서는 어떻게 공부하고 생활하는지 참 궁금한데 그건 이번 생에서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으려나.       


드디어 ‘그’ 날이 밝았다. 태국에서 처음 교단에 서는 날.

방콕 도착 후 하루하고 반나절 동안의 한국어교원 대상 연수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파견 지역인 ‘차층사오’로 와서 지역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그다음 날 바로 수업이다.

첫날을 앞둔 긴장으로 밤잠을 설쳤더니 아침부터 이미 피로가 몰려든다.    

한국에서부터 구겨질까 고이 모셔온 생활 한복을 입고 전투지를 향하는 비장한 마음으로 숙소 문을 나섰다. 나의 파트너인 태국인 한국어 교사 펜이 첫 등교를 돕겠다며 직접 차를 끌고 숙소 앞으로 왔다. 내가 살게 된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15분이라 보통 걸어서 출퇴근하게 될 테지만 이 날만큼은 출근 첫날이니 펜 선생님이 세심하게 신경을 써 준다. 고마운 나의 파트너!   

펜 선생님은 하얀 피부에 나보다 키가 큰(태국에서 보기 드문!) 다정하기 그지없는 30대 초반의 여성이다. 한글 생김새에 반해 대학교에서 한국어 전공을 결심했다는 그녀의 한국어 구사가 제법 훌륭하다.(한국어를 잘 못하는 한국어 교사들도 제법 있다는 게 정설.)

‘찡찡(정말이요.)!’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 된소리 발음을 할 때면 떨리는 작은 울림이 참 듣기 좋다.  


교문을 들어서니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이미 조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태국 학교는 매일 아침마다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조회를 한다. 아침부터 뙤약볕과의 싸움이다. 나와 펜 선생님은 서둘러 학생들 뒤로 가서 섰다. 이날은 교사와 학생들에게도 새 학기의 첫 등교이자, 코로나 시국 이후 본격적으로 대면 수업으로 전환하여 모두가 학교로 등교한 날이기도 했다.   


첫 등교날이니 새로운 외국인 교사 소개를 이날 전교생 앞에서 할 거라는 계산으로 무더위에도 한복을 차려입고 온 건데 오산이었다. 외국인 교사 소개는 언제쯤 할 것 같으냐는 내 물음에 펜 선생님의 말.   

“교장 선생님이 매우 즉흥적이셔서 조회 시간에 무얼 하실지 아무도 몰라요.”  

(결국 외국인 교사 소개는 내가 평상복을 입고 온 출근 둘째 날 했다.)    

    

2.

태국에 오기 전 수업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태국의 한국어 수업에서 쓰는 교육 교재도 태국에서만 통용되는 한국어 교과서로 진행한다고 하니 한국에서 수업 준비에 대한 갈피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더해, 내가 가르칠 학년에 대해서도 수준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모음, 자음부터 가르치려나 대충 짐작만 하고 자음, 모음 커리큘럼만 이것저것 열심히 찾아본 것이 준비된 전부였다.     


내 수업 일정은 4, 5, 6학년(태국식 고등학교 1, 2, 3년) 전공반은 주당 각각 4시간씩, 교양반은 각각 2시간씩, 그리고 동아리 수업까지 해서 총 19시간이 배정되었다. 한 수업당 2시간씩 진행해야 한다.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수업이 많은 것 같으니 저는 이만, 하며 도망갈 수도 없잖아. 부딪혀 봐야지. 다행히 교양반은 펜 선생님과 함께 수업에 들어간다. 전공반도 이번 주는 첫 주이니 펜 선생님이 같이 들어가 주기로 했다.

(*전공반은 자신의 의지로 한국어 공부를 선택한 학생들이 모인 반이고 교양반은 학교에서 임의로 정해서 모인 학생들이 모인 반이라 한국어 공부에 대한 의지가 크지는 않다)


대망의 첫 수업은 6학년(태국에서는 고 3) 한국어 교양반이다.

펜 선생님이 함께 들어가는 반이라 큰 부담 없이 들어가려 했으나, 생애 첫 수업이다 보니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칠판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누구도 고쳐줄 의지가 없다는, 고장 난 에어컨이 장식으로 있는 한국어교실.  

40명이 넘는 학생이 더위에 엿가락처럼 늘어날 것 같은 교실에 빽빽이 앉아있다. 천장 위에서 돌아가는 몇 대의 선풍기는 더운 바람을 순환시켜 교실 안은 그야말로 찜질방이다.

학생들을 보니 긴장과 더위가 한꺼번에 몰려와 땀이 차오른다. 속옷까지 축축하다.


마스크를 통과하는 말소리가 작게 들려서 마이크를 들었다.

내 이름을 말하고 너희들과 함께 공부하게 돼서 기쁘다, 태국에서 처음 가르치게 되었는데 너희가 첫 학생이라 매우 반갑다, 너희는 6학년이니 한국어를 잘할 거라는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나의 첫인사말이 끝나면 학생들이 새로 부임한 외국인 선생님에게 환호를 보낼 거라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이 미미한 반응은 뭐지. 썰렁하다. 당황스러웠다. 여고생들 특유의 소란스러움은 어디에도 없다.

내 계획에 따르면 학생들의 환호성 후 따라올 질문 세례, 예를 들어 고향이 어디인지, 아이돌은 누구를 좋아하는지, 결혼은 했는지, 남자 친구는 있는지 등등의 질문에 답을 할 차례인데.

이젠 진땀까지 땀 행렬에 가담해 몸 여기저기에 물줄기가 줄줄 흐른다.      

“교양반이라 학생들 한국어 수준이 낮아요.”

펜 선생님이 학생들의 미약한 반응에 대해 변명하듯 설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얘들아, 인사가 끝나면 박수 정도는 눈치껏 쳐주면 좋잖아...


한국어반 학생들의 한국 이름으로 출석을 불렀다.(한국어반 학생들은 모두 각자 한국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름이 호명되면 손을 들어 ‘네!’라고 대답을 하는데 단번에 대답하는 학생이 몇 없다.  

출석을 부른 이후부터 2시간의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 기억이 사라졌다.

한국어가 어느 정도 익숙한 학생들과의 첫 시간은 자기소개를 시키면 첫 시간은 금방 간다는 기존 선배 교사들의 팁을 계획이랍시고 하나 달랑 들고 왔건만. 자기소개는커녕 한국 이름도 방학 동안 까먹어버린 학생들 대상으로 즉흥적으로 수업을 진행하느라 뭐가 어찌 돌아간 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심지어 나의 파트너 선생님인 펜 선생님은 내가 첫 수업을 알아서 진행해주기를 바라고 있었고, 나는 첫 시간이니만큼 펜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할 생각이었으니 수업은 산으로 바다로 제멋대로 흘러갔다.  

이거 참 난감하다, 난감해.

기대가 컸던 첫 수업이었는데 무기력해 보이기까지 한 학생들의 반응에 수업 마치고 교무실로 향하는 내 어깨가 축 처졌던 것만 기억에 또렷하다.

학생들의 반응도 내 기분도 그저 더위 탓이라고 믿고 싶었다.     


3.

점심시간 후 있는 4학년(고 1) 한국어 교양반에 대한 더욱 걱정이 컸다. 6학년의 첫 수업에 대한 난감함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 경험에서 얻은 교훈으로 기대는 버리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수업에 들어갔다.

첫인사 후 학생들에게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4학년은 한국어 수업이 처음이라 한국 이름이 없다. 인터넷의 힘을 빌려 찾아낸 여러 한글 이름들을 종이쪽지에 적어 상자에 넣은 후 한 명씩 나와서 뽑게 했다. 아직 자모를 모르는 학생들이라 쪽지에 적힌 이름을 읽을 수도 없다. 그래서 이름을 뽑으면 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음가를 알려주었다.

구름, 여름, 사랑, 봄 등 한글 이름이 학생들에게 더 교육적이고 기억하기 쉽다는 선배 교사의 팁을 태국에 도착하고 나서야 듣게 되어서 한국에서 만들어 온 지희, 연정, 지혜 등등의 한자 이름 쪽지 뭉텅이는 과감히 버렸다.

그다음 학생들이 자신의 생소한 이름을 익숙하게 말할 때까지 연습하기를 기다린 후, ‘이름이 뭐예요?’ ‘저는 겨울입니다.’ 대화를 짝과 서로 연습시켰다.

짝 활동 후에는 짝과 함께 일어나서 서로를 소개하는 말하기 연습을 시키며 발음이 어눌한 학생들의 발음을 고쳐주다 보니 학교 종이 울린다. 두 번째 진행하는 수업이라 학생들을 둘러보며 웃을 여유도 생겼다.      


땅이 꺼져 나를 삼키는 일 없이 무사히 새 학기의 수업 첫날이 지나갔다.

첫날의 감상, 자기 전 일기장에 한 줄로 남겼다.

‘오늘의 땀 세례는 어찌 전개될지 모를 미지의 수업에 대한 플랜 B, C, D를 준비하지 아니 한 벌!’    


 

한국어 교실. 책상에 낙서한 흔적들을 보니 학창 시절이 생각나 매우 정겹다.
전교생이 모여 진행하는 조회 시간. 아침부터 고생한다 우리 학생들!
첫날의 한국어 수엄. 정신 없이 보냈으면서도 사진을 남길 힘은 있었나 보다. 4학년(고1)은 흰 리본을 머리에 묶고 5학년은 파란색, 6학년은 검정색 리본을 묶어 학년을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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