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은 가진 가족은 결코 평범해질수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 시작된 걸까? 나의 부모가 가난한 것? 내가 가난한 막노동자의 집에서 태어난 것부터 시작해서, 계속 가난하게 자란 것? 엄마가 소아마비로 오른손에 장애가 있었던 것? 시골에 땅 한 마지기가 없어서 결혼 후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상경해 미아리 판자촌에서 시작한 것? 그리고 그런 가정에서 아이들을 낳은 것, 이 모든 게 잘못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건 누구의 잘못일까?
아이를 낳은 후부터 나의 삶은 온통 내 삶이 아닌, 아이들에게 맡겨진 삶이 되었다.
질병에 지친, 가난의 되물림의 삶을 끊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죽어야 하나? 태어난 아이들은? 아이들과 함께 죽어야 하나? 이 아이들은 살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닐까? 내가 과연 아이들의 나 없는 미래를 걱정하며 그들의 인생을 끝낼 수 있는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정신 없이 하루 종일 운다, 신생아들이. 아이가 우는 게 당연하지만, 그들은 살려고, 불편하다고 우는 것이다. ‘세상에 왜 나를 태어나게 했어? 그럼 나를 편하게 해줘야지, 이게 뭐야?’ 내 잘못이다. 내가 왜 아이들을 낳으려고 했을까? 이 아이들은 무슨 잘못이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끝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두운 터널을, 눈을 뜨지 못한 채 손으로 벽을 만지며 더듬어서 기어가고 있는 듯하다. 이 길의 끝은 있을까? 끝에는 과연 빛이 있을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얼어붙은 겨울을 지나, 따뜻한 햇살을 가득 머금은 헐거워진 흙의 부드러움을 발끝으로 느끼는 봄을 나는 과연 맞이할 수 있을까?
어렵게 임신을 했고, 수정관 시술로 겨우 임신을 했다. 늦게 결혼한 만큼 그 아이에게 집중하고 싶었지만, 아이는 6개월부터 조산으로 긴급 입원을 했다.
“저, 갑자기 배가 수축이 진행돼요.”
근무 중에 갑자기 배에 태동과 수축이 일어나서, 잠깐 근처 산부인과에 갔다.
“어머님, 빨리 지금 다니시던 종합병원으로 가세요. 꼭 가셔야 해요.”
산부인과 의사의 말을 듣고, 바로 다니던 아산병원 응급실로 갔지만, 입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나오려고 한다면서요. 그런데 왜 입원이 안 됩니까?”
“지금 병실이 없어요. 특실인데… 아, 여기도 없네요. 협력병원으로 이송해 드릴게요. 인큐베이터가 있는 병원이에요. 이 리스트 보시고, 가능한 곳으로.”
“애기가 나오려고 하는데, 다니던 병원 말고 다른 병원으로 가라니요?”
“환자분, 병실이 없어요.”
그렇게 해서 이송된 병원은 따로 병실이 없어서, 산모들이 출산하기 전 지내는 대기실에서 지내게 되었다. 모든 애기 낳으러 온 산모들, 하루면 순풍처럼 낳고 가는 그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나 같은 고위험 산모, 조기 수축, 이런 이벤트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산모들.
“조기 수축이 계속 진행돼서요. 마그네슘으로 시작했는데 부작용이 있으셨고, 라보파는 효과가 없으시고, 더 이상 맞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트레토실로 바꿨는데, 다행히 수축이 좀 안정화되어서 계속 맞아야 할 것 같아요. 계속 경부 길이가 그렇게 긴 편은 아니에요. 현재 경부 길이 0.8cm이고요. 이제 앞으로 마지막 3 사이클 맞으면 그 후부터 보험이 안 돼요.”
“얼마인데요? 맞는 것에 따라서 다르죠. 산모님이 고위험이라서, 결정하시면 알려주세요!”
인터넷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럼 병원비, 지금 26주차니까 30주까지라도 버티려면 얼마일까? 30주차면 그래도 아이는 괜찮겠지.
몇천만 원의 비용, 임신하기까지도 적잖은 돈이 들었는데, 이제 휴직을 하고 계속 누워만 있을 생각하니 비용이 감당이 안 되었다. 바로 톡으로 남편에게 전화했다.
“자기야, 나 수축이 안 잡혀서 트레토실이라는 주사로 바꿨는데, 이게 비용이 일주일에 2~3 사이클 맞아야 할 것 같은데, 300만 원 정도, 30주차까지 맞으려면 1200만 원, 병원비만 1500만 원 들 것 같아.”
“맞아야지. 니 돈으로 맞어. 나 집 대출 있어서 매달 이자 나가고, 그거 갚아야 돼. 나 회의.”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회사는 바쁘지만, 지자식 아닌가? 내 자식만이야? 난 애 지키겠다고 다 포기하고 누워있는데, 대출 갚아야 한다고 말하며 ‘니 돈으로 하라’는, 15년 동안 직장생활 했다고 돈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딱 잘라서 저렇게 말하는 게 너무 미웠다.
너무 속상해서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니 자식이 잘못되면 너만 속상해. 아이는 엄마가 키우는 거야. 지금은 다 잊고 아이만 지킬 생각해.”
이 말이 맞았다. 지금은 돈을 생각할 때가 아닌데, 매정한 남편인지 현실적인 남편 때문에 돈을 생각했다.
병원에서 먹을 때만 앉으라고 해서, 소변기를 달고 누워서 용변을 보면서 4주를 버텼다.
“감기인 것 같아요. 자꾸 오한이 나고 머리도 아파서요.”
“두통은 혈압이 너무 높아서 그런데, 임신중독증인 것 같아요. 단백뇨 검사해보시죠.”
단백뇨 검사가 나오자, “출산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일정 잡겠습니다. 인큐베이터가 모자라서 수배해야 해서요.”
“짐 30주밖에 안 됐는데 아이가 건강할까요?”
“임신중독증에서 아이가 배 속에 있는 게 더 위험할 수 있어요.”
그렇게 결정된 30주 1일차의 제왕절개 수술 후, 바로 걱정되는 것은 아이의 울음소리였다.
아이는 나오자마자 울지를 못했다. 울음소리가 안 들렸다.
“자기가 우리 애기 울음소리 들었어?” “바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갔어.”
2달 동안 누워있었더니, 걸을 수가 없었다. 못 걸어서 아기가 있는 NICU에 갈 수가 없었다. “나 휠체어라도 타고 갈래, 아기 보고 싶어. 나 좀 부축해줘.”라고 했지만, “괜찮아.”라는 반응과 한번도 찍어오지 않는 남편이 이상했다.
“정말 아기는 괜찮아?”
아무 대답 없는 남편에게 성질을 부리고, 하루에 1번 있는 NICU 면회 시간에 휠체어를 타고 갔다.
“도시현, 1.13kg으로 쓰여 있는 아이, 자가 호흡이 안 돼서 인공호흡기를 하고 있었고, 황달이 있어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이른둥이 기저귀라도, 기저귀가 몸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 배가 무색하게, 너무나 작고 까맣다. 인스타에서 보던 그 아기의 토실토실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너무 속상했다. 눈물이 주르륵 나왔다. “왜, 내 아기가…”
남편은 집중치료실 NICU 치료에 있을려면 의료비를 지원받으려면 출생신고부터 해야 한다고 했다.
급하게 부모가 된 나의 아기에게는 치료를 위해서 나의 사인이 필요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차가운 의사들의 말에 다시 한번 눈물이 핑 돌았다.
무거운 진단명으로 ‘기타 저체중출산아, 신생아활동, 선천성 호흡곤란 증후군, 신생아패혈증, 뇌실내출혈 3기, 백질연화증, 미숙아 망막증, 거대세포바이러스’
아이를 두고 나 혼자 산후조리원을 갈 수 없어서 집으로 갔다. 집으로 퇴원한 나는 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할 일도 없었고, 모유를 유축하고 얼리고, 그것을 하루에 한 번 매일 모유를 배달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왜 나에게, 왜 우리 아기한테…”
장기 입원 환자, 2달 정도 산모 대기실에서 있던 나에게 간호사분들이 롤링페이퍼를 주셨다.
“어머니가 고생하신 만큼 아이의 예후는 좋은 거예요. 실망하시지 말고, 아이를 믿고 힘내세요.” 그 말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가 2달 동안 NICU에 있는 동안, 일반 산후 조리도 못하는 상황에서 미역국을 끓이면서 갑자기 서글퍼졌다. “애야, 애는 병원에 있고, 너만 퇴원했으나, 집 청소, 빨래 아주머니는 안 쓰는 게 어떻니? 이제 아이도 퇴원하면 아껴야 하지 않니?” 1원도 안 보태주시면서, 2달 동안 누워있어서 다리에 힘도 없는 나한테, 2달 동안 빈집을 치워야 하고 남편이 정리 1도 안 해 놓은 집을 정리해야 되는 나한테 시어머니가 한 첫 마디였다. 내 병원비 수천만 원, 아이 병원비 합해서 아이를 낳았다고 도와주지도, 내가 바라지도 않았는데, 왜 저런 말을 하는지 화가 났다.
우리 엄마가 아픈데 아빠 병간호도 해야 되서 내 산후 조리를 못해주니깐 저런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어머님, 저의 병원비, 애 병원비, 다 제가 냈어요.”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듣고 마는 것 같다. 자꾸 돈 관련해서 나한테 얘기를 하는 남편과 그의 어머니를 볼 때, 이 아이가 재활 치료비가 얼마가 들지 모르지만 예후가 안 좋아지면 저들이 낼까? 내가 출산 육아휴직을 끝내고 돈이 없을 때 저들은 어떻게 나올까?
나의 부모님 두 분은 모두 편찮으셨다. 엄마는 감염성 심내막염으로 인한 심장판막질환이었고, 아빠는 특발성 폐섬유화로 어느 순간 폐 한쪽은 망가져 있었다. 부모님이 아프지만 난 괜찮으니깐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녔다. 내가 이 아픈 집 구석에서 살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돈을 벌어서 어떻게든 독립하는 것이었다. 부모님이니깐 마음은 아팠지만 부모님이니깐 그들의 문제라고 외면하고 도망 다닐 수 있었다. 집보다 편한 학교로 와버리고 시험 기간이라고 야자를 하다가 집에 갔다. 학창 시절을 그렇게 보내다가 돈을 벌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새벽에 나와서 저녁에 들어가면 되었다. 이렇게 평생 피해 다니다가 지쳤다. 편안한 가정, 집. 휴식 같은 집이 너무나 그리웠다. 엄마가 아플 때 보호자로 병원에 가지도 않고 수술을 하지도 않아도 되는 그 평범한 일상들, 보통 사람들의 일상, 밤에 응급실에 뛰어가는 새벽까지 의자에 앉아서 엄마의 다리를 주무르면서 쪽잠을 자고 출근하는 그 삶? 항상 대기조의 삶, 언제 병원에서 전화 올지도 모르는 평생 아픈 부모님과 좀 떨어져 지내고 싶었다.
평범한 가정을 원했다. 평범한 삶을 원했다. 특출날 것도 없고 특별한 재능도 없었던 나에게 평범한 삶을 이루는 건 큰 행운 같이 느껴졌다.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가정들처럼 하루의 일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침이 되면 엄마가 아이들을 깨우고 아빠는 회사로 출근해서 일하다 저녁이면 퇴근하고 아이들은 학교를 갔다 와서 엄마가 해 놓은 따뜻한 밥상에서 함께 밥을 먹고 과일을 먹으며 하루 일과를 나누다가 같이 살을 부비며 자는 일상의 소소함의 평범을 바랬다.
내가 그리는 그 평범이라는 것은 사치인 걸까? 왜 나에게 이런 평범이 처절하게 허락되지 않는 걸까? 어렵게,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원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