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화. 이 사 - 2

토리네 게스트하우스

by 이작

서장연 혼자 연습실에서 악보를 적고 있다가 기영이 들어오자 평소처럼 물었다. 기영은 평소와는 다르게 멍하고 많이 지쳐있는 표정이다. 몇 년을 함께 했던 기영이지만 생소한 느낌마저 들었다.


“기영 왔냐?”

“응.”


서장연이 놀라며 다시 쳐다본다.


“어? 야! 너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쉬는 날이냐?”

“어? 어.”

“짜식, 진작 말하지. 그럼, 사왔냐?”

“어? 뭘?”

“또 그러네. 너 배터리 사온다고 했잖아. 왜 이렇게 멍해 오늘? 저기 이펙터에 넣을 거. 배터리 싸게 파는 데가 집에서 가깝다며?”

“아 맞다. 지금 갔다 올게.”


다시 나가려는 기영을 서둘러 잡는다.


“야야. 지금 어딜 가! 한번 모이기도 힘든데 그냥 나중에 사와. 어차피 지금 안 써.”

“어. 미안하다. 다음에 꼭 사올게.”

“알았으니까 좀 와봐. 나 지금 곡 하나 만들었는데 이거 한번 들어보고 가사 좀 써줘. 이런 거 너 전문이잖아. 야, 난 이게 더 어렵다.”

“어.”


기영은 평소와 다르게 멍해 보이기도 하고 기가 죽어있는 것 처럼도 보였다. 장연은 한번도 기영에게 배터리를 사오라고 한 적이 없었다. 가까운 곳에서 싸게 파는 곳을 발견했다며 본인이 사오겠다고 했던 것이었는데 그 약속을 못 지킨 것이 저렇게 까지 기가 죽을 일은 아니었다.


“야! 배터리 안 사왔다고 뭐라고 한 것 때문에 그러는 거냐? 왜 그렇게 쳐져 있어? 또 무슨 일 있는 거냐? 뭐, 집에서 쫓겨나거나 그런 큰 일 아니면 말하지도 마라. 나도 지금 이거 하느라 머리 아프니까.”

“응.”


침묵이 흘렀다. 악보를 보던 장연이 기영의 눈치를 보더니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그랬냐?”

“응.”

“쫓겨났다고?!”

“응.”

“크크크, 파하하!! 웃으면 안 되는데. 뭐냐 넌. 도대체 너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계속 일이 터지는 거냐? 집주인이 나가래? 갑자기?”

“응.”

“크크크, 에이, 됐다. 더러워서 뭐, 좋지도 않은 집. 까짓 거 더 좋은 데로 구하면 되지. 뭐 일주일 안에 나가라고 떼쓰는 거 아니면 말하지도 마라. 나도..”

“응.”

“응? 다음 주까지 나가래?”

“아니, 지난주에 말해서 오늘 짐 옮겼다.”

“음··· 아··· 음··· 미안하다. 내가, 그냥 미안해.”

“근데 다행히도 알바 하는 데서 공사하려고 비워 놓은 집 잠시 써도 된다고 해서 일단 그리로 들어갔어.”

“아이, 짜식이. 그럼 일단 된 거지 뭐. 근데 하필 공사하는 집이냐? 거기 들어갔다고 알바비 안주고 뭐 그런 건 아니지?”

“어. 공과금만 뗀대.”

“그래. 뭐. 그 정도면 됐네 일단은. 그럼 이사는 다 한 거냐?”

“이사라기 보다는 방금 짐만 다 옮겨 놓고 여기 누군가 있을 시간인 것 같아서 와봤지. 너 나갈때 쯤 가서 정리하고 밤에 또 오면 되겠다.”


때마침 이영천이 들어왔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오! 오늘은 다들 있네? 뭐냐? 뭐 좋은 일 있냐? 왜 다 모여 있어 이 시간에?”

“야! 우리 얼굴 안보이냐? 지금 분위기 궁서체잖아.”

“아 진짜 이것들은 걸핏하면 궁서체야. 오늘 기분 좋았는데!”

“미안하다. 나 때문에. 내가 숙소를 갑자기 옮기게 돼서 그래.”

“그래? 잘됐네. 야, 나중에 우리 거기 가서 연습하고 그래도 되지? 여기는 지하라 너무 꿉꿉하고 냄새 나서.”

“영천아. 궁서체라니까! 그런 거 아니고.”


장연이 분위기 파악 좀 하라는 말투로 쏘아 댄다.


“숙소 옮기는데 궁서체가 어딨어? 좋은 거 아냐? 원래 있던 곳도 어차피 맘에 안 들어 했잖아, 어둡고 꿉꿉하다고. 저 기영이 새끼도 은근히 눈 높은가 보네? 너 집들이 안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고 쫓겨난 거야.”


이영천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심각하게 물었다.


“왜 쫓겨나? 뭐 잘못했어?”

“아니, 월세가 밀려서.”

“아, 이 새끼, 좀 내지 그랬어! 쫓겨날 만하네! 그 집 빌려주는 사람도 세금이 얼만데.”


영천은 말이 안 통한다는 듯 벌떡 일어나 항상 앉던 자리로 옮기며 투덜거렸다.






게스트하우스는 반지하층이 있는 지상 3층 건물 이다. 반지하와 1층은 각각 두 집, 2, 3층은 한집씩이 있었고, 건물 왼쪽에 비어있는 널찍한 마당이 있었다. 3층의 옥상으로 나가는 통로를 개조해 작은 카페가 꾸며져 있고, 반 지하 두 집 중 한 집을 식당 및 사무실로 사용 중이었다.


기영이 지내게 된 2층은 네 개의 방이 딸려 있었다. 썩 깨끗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전에 기영이 살던 곳보다는 훨씬 아늑하고 좋았다.

기영은 박스를 쌓아 놓고 두 번째 박스를 풀고 있다. 박스 바닥에 깔려있는 몇 개의 잡동사니들을 제외하고는 옷걸이 채로 박스에 넣어서 그대로 옷장에 걸자 정리가 끝났다.

이 방은 다른 방에 비해서도 꽤 컸다. 커다란 창문이 있었고, 넓은 책상과 침대가 세 발자국 거리로 떨어져 있었다. 작은 거울과 시계가 책상 위에 걸려 있고, 전체적으로 노란 간접 조명이 들어오도록 인테리어 된 방이었다.


세 번째 박스를 열자 주방에서 사용하던 그릇이 보인다.


“이건 통째로 주방에 내놔야겠네. 집이 넓으니까 좋긴 좋다.”


기영이 박스를 들고 일어나자마자 현관문 밖에서 부터 ‘쿵쿵쿵’ 하고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열려있는 현관에서 화난 듯이 기영을 불렀다. 톤이 높고 가는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아저씨! 아저씨!”


현관문 앞에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얼굴이 작고 동그란 여자아이가 손에 작은 택배 박스 하나를 들고 서있었다. 화가 잔뜩 나있는 듯한 얼굴에 유난히 큰 여드름 하나가 돋보인다. 기영이 박스를 들고 거실로 나오며 말했다.


“어? 나?”

“네!”

“왜?”

“이거 아저씨 꺼 맞죠? 여기 배달 주소 아래에 아저씨 이름같은 거 써있던데. 아 쒸. 아저씨 이런 거 떨어뜨리고 다니면 어떻게 해요? 밖에 깜깜한데 지나가다 걸려서 넘어질 뻔 했잖아요! 설마 계단에다가 버린 건 아니죠?”


속사포처럼 따지는 목소리에 기영은 걸음을 멈췄다.


“엇! 그거, 미안.”


‘유리’인 것 같았다. 아저씨에게 며칠 전에 들었던 기억이 났다. 두 딸이 있는데 ‘유리’와 ‘소리’라고 했다. 통통거리며 뛰어다니는 ‘유리’와는 다르게 아직 초등학생 티를 못 벗은 녀석이 ‘소리’라고 했다. 저 녀석은 ‘통통거린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것이 ‘유리’가 틀림 없었다.


기영이 유리에게 손을 내밀어 보려 했지만 들고 있던 박스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른 손으로 시도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주방에 박스를 내려놓기로 한다.


“잠시만.”


기영이 주방으로 방향을 바꾸며 말했다.


“한 번에 여러개씩 옮기다 보니까 떨어뜨렸나 봐. 어두워서 못 봤네. 어쨌든 고마워. 근데 넌 누구야?”

“나요? 나 몰라요?”


유리가 작은 박스를 들고 화가 났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팔짱을 꼈다. ‘나 진짜 화가 났거든?’이라는 말의 정확한 표현이었다. 미간에도 작은 주름이 잡혔다.


“어. 나 여기서 일한 지 이주 정도 됐는데 넌 처음 본다. 너는 나 아니?”

“그른가? 생각해보니까 나도 아저씨 첨 보네. 맨날 말로만 듣다가.”

“큭큭. 그렇지? 누군지 몰라도, 어쨌든 반가워. 근데 너 누구지?”

“저 여기 우리 아빠 딸이에요.”

“뭐? 그렇··· 겠지? 아마도? 아빠의 딸.”


유리는 자기가 말하고도 뭔가 이상했는지 한쪽 손가락을 왔다갔다 하며 생각하다가 확실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간의 주름이 더욱 짙어졌다.


“그, 끅끅 거리면서 입 벌리고 웃고 다니는 아저씨 알죠? 그 아저씨 딸이라고요.”

“아. 네가 유리구나. 소리 언니. 맞지?”

“어? 이름 어떻게 알아요? 우리 본 적도 없고 안 가르쳐 줬는데? 혹시 스토커에요? SNS 털었어요?”

“야야. 그건 아니고, 아저씨한테 들었어. 통통거리고 튀어 다니는 녀석이 하나 있는데 유리라고 한다고, 둘째는···”

“아 됐어요!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말라고 아빠한테 백만번도 넘게 얘기했는데 또 그러나 봐요. 아 짜증 나네. 이거 여기 놓고 갈게요.”

“그래, 뭐.”


관심 없다는 듯 유리는 박스를 툭 떨어뜨리고는 뛰어나가 버렸다.

짐 정리가 끝난 후에 기영은 거실에 배치돼 있는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했다. 책상 서랍을 열어 안쪽까지 닦다 보니 낡은 필름 통 세 개가 굴러 나왔다. 모든 통들이 투명했다. 기영은 뚜껑을 열고 습관처럼 냄새를 맡았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다시 뚜껑을 닫고 서랍 속에 던져 넣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7 화. 이 사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