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네 게스트하우스
이른 아침부터 은정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미용실로 향했다. 펜트하우스에서의 첫날이라 잠을 설친 것 같은데도 몸이 훨씬 가벼웠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울었던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유 없이 감정이 복받쳤다.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서러운 감정들도 한꺼번에 몰려왔다. 자신이 강하다고 느끼며 또 그렇게 되려고 노력했던 은정도 이번에는 참을 수 없었다. 견고한 모래성이 힘없이 파도에 무너지듯 허무하게 무장 해제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알 수 없는 편안함이 몰려왔다. 따뜻하고 포근한 감정이 은정을 감쌌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곪아 터져 버린 상처에 새 살이 올라온 듯 그녀의 아픔이 무뎌져 있었다.
새벽에 잠에서 깬 은정은 기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게 통화 목록을 뒤졌다. 그의 번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미연결 전화들. 모두 기태였다. 그 중 하나에 손가락을 얹었다.
미용실 정문 앞에서 고급 차가 이미 입구를 막고 은정을 기다리고 있다. 은정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다가갔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곧바로 기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동차 지붕에 두 팔을 얹고 하얀 약 한 알을 꺼내 씹었다. 알약이 부서지는 ‘우드득’ 소리가 들린다. 불량스러운 표정을 제외하고는 마치 데이트를 하러 나온 사람처럼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다. 심지어 짙은 남자용 향수까지 느껴진다.
“어쩐 일이에요? 이른 아침부터 전화까지 다 주시고.”
그의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은정은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매일 오시니까 아예 일찍 나와서 먼저 해드리려고요. 들어오세요.”
은정이 미용실로 들어서며 불을 켜고 의자 하나를 정리했다.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실실 웃으며 의자로 향하는 동안에도 기태의 시선은 거울을 통해 은정에게 고정돼 있다.
은정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던 기태의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지더니 작은 움직임마저 멈춰 버린다. 그녀에게서 뭔가 이상한 것이 느껴졌다. 기태의 눈은 거울로 반사된 은정에게 똑바로 고정돼 있었다.
“왜요? 머리 안하시려고요?”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네? 왜 그러세요?”
“아, 아니 어떻게···”
기태는 놀란 표정으로 거울을 통해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기태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은정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몹시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결국 문 쪽으로 한걸음씩 뒷걸음질을 치며 뭐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머리 하고 가셔야죠!”
“아, 아니 다음에.”
기태는 빠른 걸음으로 미용실을 나가버린다.
“무슨 일이야 도대체? 갑자기 왜 저래?”
그의 검은색 차가 급히 떠나 버린 후에 은정은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 봤지만 다른 때와 다른 점은 찾을 수 없었다.
“뭐야? 사람이 더 이상해졌어. 아 참! 펜트하우스에서 나왔다고 연락해줘야 하는데. 아저씨.. 아저씨.. 아! 여깄다.”
출근 메시지를 쓰는 중에 김원장이 열려있는 문을 이상하게 여기며 들어온다.
“어? 은정아, 오늘 웬일로 일찍 나왔어? 방금 저 진상 손님 뛰어나가던데 어떻게 된 거야? 멀리서 보이길래 뛰어왔는데.”
“글쎄요? 저도 모르겠어요. 맨날 영업 방해 하길래 미리 해 준다고 일찍 오라고 했는데 오늘 보자마자 저러네요? 오늘 제가 좀 이상해요?”
“이상하긴. 오히려 다른 날 보다 좋아 보이는데? 혈색도 좋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뇨, 그건 아니고 어제 좀 편한 방으로 옮겼는데.”
“그래 맞아. 자는 게 중요하지. 하루 만에 얼굴이 많이 좋아졌어. 근데 저 화상은 왜 저래?”
은정이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김원장이 놀라며 말했다.
“어머, 은정아. 너 지금 웃는 거야?”
“네?”
“너 웃는 얼굴 본지 육개월은 넘은 것 같은데. 어머! 너 몸이 좀 좋아지나 보다.”
“아, 그래요? 역시 잠자리가 중요하긴 한가봐요. 주인아저씨가 좋은 방에 며칠 있게 해 주셨거든요. 메시지 보내지 말고 직접 전화해야겠다.”
‘삑삑삑삑’ 소리와 함께 기영과 주인아저씨가 벽지 두 롤과 도구들을 들고 반지하 집으로 들어왔다. 아저씨는 양손에 공구 가방을 들고 어울리지 않는 작은 가방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기둥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여성용 가방을 걸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집안 내부에서 습한 공기가 훅 하고 느껴졌다. 그 안에 곰팡이 냄새가 섞여있다.
“아휴, 엄청 습하지? 그거 가져온 건 저쪽에 쌓아 놔.”
“진짜 여기는 엄청 습하네요?”
“집안에 빨래를 널어 놔서 그래. 환기도 안 시키고.”
기영은 들고 있던 것들을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 동안 주인 아저씨는 환풍기를 켜고 화장실과 대문까지 활짝 열었다.
“오늘은 벽지를 부분적으로 교체 할 거야. 여기, 여기, 저기 이렇게 세 군데야.”
주인 아저씨가 가리키는 곳마다 곰팡이가 퍼지고 있었다. 설명이 시작 되자마자 아저씨의 핸드폰이 울렸다. 은정이었다.
“네 은정씨. 알겠습니다. 다행이에요. 그럼 나중에 봐요. 네네.”
“은정씨에요?”
“응. 출근 했다네. 이거 끝내고 나는 펜트하우스 정리하러 올라가야겠다. 여기 곰팡이는 우리 몸에도 안 좋으니까 얼른 끝내자.”
아저씨와 기영은 동시에 마스크를 썼다. 작업하기는 불편하지만 곰팡이와 본드 냄새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기영이 새 벽지롤을 뜯어 바닥에 펼치며 물었다.
“아저씨.”
“어?”
“은정씨가 예전에 있던 매니저 많이 좋아했나 봐요?”
“뭐?”
“예전 매니저 그만 둔 뒤로 저렇게 변했다고 들었어요.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아저씨는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벽지로 시선을 돌렸다.
“좋아했으면 요즘 사람들이 아르바이트 그만둔다고 떨어지나? SNS로 연락 다 되고 하는데 만나지 말래도 밖에서 만났겠지. 은정씨는 매니저 안 좋아했어. 거꾸로 매니저가 은정씨를 많이 좋아했던 거지.”
“그래요? 그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주인 아저씨는 익숙한 듯 일을 하며 무심하게 말했다.
“글쎄? 젊은 사람들 얘기를 내가 어떻게 알겠어. 잘 몰라. 그냥 예전에 작은 사고가 있었는데 그 뒤로 매니저가 아파서 그만 뒀고 그 다음에 은정씨가 저렇게 돼 버리더라고. 근데 왜? 은정씨 무슨 일 있어?”
“확실하지는 않은데, 오늘 새벽에 우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서요. 은정씨 있는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거든요.”
“아, 그랬어? 차츰 좋아지겠지. 젊을 때는 다 그런 거지 뭐. 만나고 헤어지고.
기영씨! 그만하고 그쪽 끝이나 좀 잡아줘. 벽지 다시 말려 올라오지 않게.”
주인 아저씨는 동그랗게 말린 벽지의 끝을 반대로 감아 올렸다. 기영은 잘라 놓은 벽지의 반대편을 밟고 서 있었다. 보조를 하는 기영은 상대적으로 아저씨에 비해 할 일이 없었다. 그냥 아저씨의 손과 발이 되는 것 뿐이었다.
“근데 은정씨는 왜 펜트하우스에 넣으신 거예요? 거기 있으면 진짜로 뭐가 좀 좋아지나요?”
“글쎄? 그건 두고 봐야지. 딴 생각하지 말고 거기, 그쪽 잘 밟고 있어. 여기 사람들 돌아오기 전에 빨리 해야 돼.”
주인 아저씨는 항상 펜트하우스 얘기가 나오면 말을 돌리거나 끊어 버렸다. 아저씨는 벽지를 줄자로 재서 특정 길이만큼 몇개씩 잘라내고, 기영은 곰팡이가 핀 방의 벽지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주인 아저씨가 갑자기 일을 멈추고 기영이 서 있는 곳을 보다가 급하게 기영을 부른다. 아저씨가 손에서 놓쳐버린 벽지가 다시 감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기영씨! 기영씨! 아... 내가 뭘 좀 두고 왔는데. 창고 공구 통에 보면 작은 니퍼 있거든? 그거 좀 가져다 줘. 정신도 참. 그걸 가져온다는 걸 깜박 했지 뭐야.”
“네. 그 빨간 손잡이 니퍼죠?”
기영이 웃으며 묻자 아저씨가 어색하게 끄덕거린다.
“응.”
“지금 다녀올게요.”
“그리고 올 때 커피 한잔만 부탁해. 시원한 걸로. 기영씨 마실 것도 한잔 뽑아오고. 바빠도 음료수는 좀 마시고 해야지.”
“네 그럴게요.”
커피를 양손에 든 기영이 흥얼거리며 들어왔다. 그의 윗옷 주머니에는 작은 빨간 손잡이 니퍼가 꽂혀있다. 주인 아저씨가 급하게 무언가를 허리 춤 가방에 넣다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급하게 뭔가를 한 것처럼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왔어? 목 말랐는데 잘됐다. 고마워.”
기영은 아저씨에게 커피 잔을 건네고는 윗 주머니에서 니퍼를 꺼냈다.
“여기, 니퍼도 가져왔어요.”
“니퍼? 아. 니퍼. 맞아. 이거 맞아.”
주인 아저씨는 니퍼를 받아 사용하지 않고 바로 주머니에 넣었다. 아저씨의 행동이 뭔가 불안하고 어색하다.
“그럼 여기는 부분 도배만 하면 끝나나요?”
“응. 뭐. 다 잘라 놓고 거의 뜯었으니까 금방 끝날 거야.”
주인 아저씨는 여전히 숨을 몰아 쉬며 아이스커피를 들이켰다.
“근데 저 나가있는 동안 뭐 하셨어요?”
“아냐 별거 아냐. 그냥 작업할 거 준비하느라.”
“또 혼자 일하신 거예요? 다음부터는 같이 해요.”
“그래. 그러자.”
기영과 주인 아저씨가 지친 듯 짐을 들고 식당으로 들어왔다. 아저씨는 기분이 좋아 보인다.
“수고했어.”
“고생하셨어요.”
“나 혼자 할 때는 종일 했었는데 역시 같이 하니까 빠르네. 얼마 안됐는데도 금세 적응했네?”
“아니에요. 시키시는 대로만 했는데요. 뭐.”
“그래도 못하는 사람은 못해. 이게 쉬워 보여도 감각이 있어야 하는 거라.”
“그런 건가요? 그럼 저도 이제야 적성을 찾은 거에요?”
“그런가 보네. 허허.”
주인 아저씨는 쉰 웃음을 웃으며 청소 도구를 따로 챙겼다.
“어디 가시게요?”
“아까 은정씨 전화 왔었잖아. 펜트하우스 정리하러 가려고.”
“그럼 같이 가요.”
“아냐. 거기는 일단 내가 갈 테니까 신경 쓰지 마. 기영씨 일 좀 적응된 것 같으니까 조만간 내가 필요하면 부탁할게.”
역시 오늘도 펜트하우스 청소는 아저씨의 몫이었다. 기영은 일이 줄어서 좋긴 했지만 아저씨가 혼자 갈 때마다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찜찜하게 느껴졌다. 문을 나서기 전 아저씨는 은정에 대해 알아둬야 할 사항이라며 말을 전했다.
“은정씨는 요즘에도 따라다니는 스토커 놈들이 있어서 불편해 하는 것 같더라고. 미용실에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예전에도 그런 사람들이 꽤 있었나 봐. 그래서 집을 자주 옮기지 못하니까 옮기기 쉬운 이런 곳에서 장기로 몇 달 있다가 다른 데로 옮기곤 하거든.”
“아, 그런 거였어요?”
“그래서 처음에 말했었던 것처럼 혹시라도 누가 찾아와서 입주자들 물어보면 절대로 알려주지 마. 뭐 그거 아니더라도 개인에 대한 정보는 다른데 가서 절대 얘기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