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산티아고! 아, 산티아고!

MONTE DO GOZO ~ SANTIAGO, 35th Day

by 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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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직은 어두운 이른 새벽. 커다란 건물 처마 밑에 몇 명의 순례자들이 침낭을 깔고 길바닥에서 자고 있다. 그곳을 지나 넓은 광장에 다다르니, 청소차 한대가 왔다 갔다 하며 바닥을 쓸어댄다.

여기가 어디일까 안내책자를 뒤졌다. 난 책자에 있는 사진과 정말로 똑 같은 건물 앞에 서있었다. 35일동안 걸어온 그 길의 끝에 산티아고 대성당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새벽 일찍 길을 나서다 보니, 아침 7시가 채 되지 않아 이곳에 도착해 버렸는데, 막상 대성당 앞에 서고 보니, 아무런 실감이 나지 않는다. 책자의 사진을 몇 번이고 구석구석 비교해 보며 이곳이 맞는지 계속 확인했다. 내가 오려고 했던 곳이 틀림 없었다. 왜 난 이곳을 그토록 오려고 했을까? 그 동안 길에서 만났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고생과 감동이 떠오르지만, 내 마음속은 이상하리만큼 평화롭고 잠잠하다. 물고기 한 마리 없는 잔잔한 호수처럼 작은 흔들림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성당건물이 생각보다 작고 매력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길을 걸으며 봤던 그 어떤 건물보다 화려했고 아름다웠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단지 대성당 건물 자체는 나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던 것 같다.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된 자리에 세워졌다는 종교적으로 큰 산 같은 저 산티아고 대성당은 그래서 저렇게 무표정하고 덤덤하게 보여지는 것 같다.

부슬부슬 비가 오는 새벽, 광장에서 차분하게 맞은 산티아고의 아침은 시간이 갈수록 물이 고이듯 하나하나 순례자들이 흘러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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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사무실 앞에 무거운 가방을 줄 세워놓고 바로 앞의 바에서 그곳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산티아고케익과 커피를 주문한 후 신부님 일행을 기다렸다. 광장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서인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부님과 그 일행들이 나타났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줄 서있던 순례자들이 한 명씩 2층으로 올라갔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같은 길로 내려오는 그들의 손에는 인증서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한 사람씩 내려올 때 마다 줄 서있던 모든 순례자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한다. 나도 그 줄에 섞여 있다가 결국 2층 카운터 앞에 서게 되었고, 간단한 문답이 있었다.



“이름이?”
“어디서 시작했나요?”


확인 후 방긋 웃으며 순례자 증서 한 장을 내 손에 건네준다. 한 장의 종이인데, 한국에서는 별 쓸모도 없는 종이인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너무도 컸다. 눈물이 울컥 나올 것 같기도 하고 미친 사람처럼 웃음이 나오려고도 한다. 소중하게 증명서를 받아 들고 아래층으로 되돌아 내려가는 길에 줄 서있던 순례자들의 환호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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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광장으로 나갔다. 이미 반 이상 꽉 차있는 광장에는 순례자들의 웃음 소리와 카메라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어디서든 안면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이름을 굳이 모르더라도 서로 축하하며 기꺼이 기념 사진의 들러리가 된다. 광장 한가운데에 누워 있는 사람들도 있고, 춤을 추는 사람,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도 있다.


문득 저 앞쪽에서 나를 쳐다 보며 한없이 자비롭게 웃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팀, 그의 웃는 얼굴이었다. 반가웠다. 팀은 부지런히 일정을 당겨 어제 산티아고에 들어왔다고 한다. 난 입고 있던 땀에 젖은 조끼 주머니에서 며칠 전 그가 쥐어줬던 부러진 유칼립투스 잎을 조심스럽게 꺼내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당신의 존재 만으로 힘을 얻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었다. 그가 건넸던 잎의 반을 자른 것이라서 이미 다 마르고 두 조각이 나긴 했지만 그도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며 함께 차나 한 잔 하자고 한다.


주변 바에서 밀크 티 한 잔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가 80이 넘은 나이에 그 길을 걸었던 것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잊기 위해서였지만 이전에 말하지 않았던 다른 이유도 있었다. 갑작스런 암으로 사망한 아내를 돌봐주던 호스피스 단체를 위한 기부광고를 내고, 그 조건으로 홀로 이 길을, 800킬로미터 이상을 홀로 걸은 것이라고 한다. 웃음을 보이며 주머니에서 기부를 위한 광고지 하나와 아내와 함께 이름을 올려 사용하던 하나밖에 남지 않은 명함, 그리고 특별한 인증서 하나를 불쑥 내 앞에 내밀었다. 크게 다른 인증서와 형식적인 부분에서 다른 것은 없었지만 내용은 다른 것이었다. 내 것에는 없는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으며 문장의 내용은 추모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순례자 협회에 따로 요청하여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름으로 사진까지 넣어 발급되어 있었다. 난 말문이 막혔고 그 증서를 통해 다시한번 그의 의지와 사랑이 느껴졌다. 내 서툰 삶이 부끄러웠다. 그는 광고지와 명함을 내게 내밀면서 말한다.



이건 네가 가져. 원한다면. 하나밖에 안남았는데 난 더 이상 필요없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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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티 잔을 입에 대고 있던 난 정신이 아득해졌다. 먹먹하고…… 감사했다. 그것뿐이었다. 이 명함, 광고지,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감사했다. 옆에 앉아있는 다치지 않은 다른 순례자들에게도 감사했다. 내가 앉아있는 의자에게도 감사하고 주변에 알지 못하는 모든것들에게도 감사했다. 난 먹먹함을 추스리며 그에대한 보답으로 허겁지겁 가방을 뒤져 한국에서 가져와 사용하던 손때 묻은 부채를 꺼내 수줍게 내밀었다. 집을 떠날 때 합죽선 두 개를 준비해 왔는데, 하나는 직접 사용하고 있었고, 또 하나는 팻에게 주었었다. 지금 내게 남은 것이라곤 내가 쓰고 있던 손때 묻은 이것밖에 없어서 부끄러웠지만 그에게 조심스럽게 건넸다. 팀은 그것을 보고 아들처럼 안아 주며 정말 특별한 선물로 간직하겠다고 한다. ‘나도 이 길에서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겠구나’라는 가벼운 생각이 마음을 한번 툭 치고 지나간다.






어느새 순례자를 위한 미사가 40분 밖에 남지 않아 팀과 함께 성당으로 올라가 나란히 앉았다. 미사가 치러지고 성인 크기의 커다란 향이 피워지며, 산티아고에 들어온 순례자들을 일일이 호명한다는 특별한 순례자 미사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 특별히 어제부터 함께 해 주신 신부님은 어느새 하얀 사제복으로 갈아 입고 성당 앞 강단에 앉아 있었다. 산티아고 성당에서의 미사는 웅장하고 감동적이었다.

예전에는 그 길을 걸은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이다 보니 “어느나라에서 온 몇 명의 사람들”로 언급된다. 미사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커다란 향이 내려왔고 그 향로를 시계 추처럼 양쪽으로 밀기 시작한다. 차츰 향로의 진폭이 커지고 거대하고 자욱한 연기를 뿜어대며 성당의 오른쪽과 왼쪽 허공을 커다랗게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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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후 어느새 신부님은 학생들 곁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선물을 골라 주며, 일일이 축성을 했다. 나도 성당을 다닌다던 특별한 한의사 친구인 진우부부를 위해 두 개를 요청했는데, 신부님은 직접 선물을 골라 그 위에 축성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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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다시 광장을 찾았다. 어제와 똑같이 오늘 도착한 순례자들이 물이 고이듯 모여들고 있었다. 그 중에 조와 두 아들 라이치와 휴고도 보인다. 어린 아이들이었지만 결국 그들도 완벽하게 해냈다. 그리고 그날은 마침 라이치의 생일이어서 그자리에서 저녁 초대를 받았다. 우연은 아니었고 휴고의 생일에 출발하여 일부러 라이치의 생일에 맞춰 산티아고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날 저녁 파티에 함께한 사람들은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 사람들이었지만 이제 그게 무슨 상관이랴. 난 즐거운 마음으로 작은 선물을 사 들고 라이치의 생일 파티장으로 향했다. 그 동안 친해져서 인지 아이들도 좋아해 주었지만 사실은 내 마음이 더 기뻤다. 라이치는 선물을 받고 고마워하며 가지고 걸었던 코팅된 네 잎 클로버를 내게 전한다. 11살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과도 이렇게 이곳에서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조도 까미노를 걷는 중에 겪었던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다. 그 일행이 작은 성당에서 하루를 묵었었는데 식사 후 서로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중 담당 수녀가 마련해 온 성구를 뽑는 시간이 되어 조와 라이치, 휴고가 모두 성구 하나씩을 뽑았는데 공교롭게도 세 명 손에 모두 같은 성구가 들려 있었다. 조는 혹시나 해서 다른 것들을 뒤집어 봤지만, 같은 성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글귀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이야기를 전하며 가방을 뒤져 잘라진 종이 세 개를 보여준다. 정말 모두 똑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생일 파티장으로 가는 길에 오랜만에 서태수 씨를 만났다. 베드벅에 물렸던 양 팔은 다행히도 거의 정상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그 팔로 급하게 불러 세우더니, 줄 것이 있다고 하며 길 한가운데에 가방을 내리고 뒤지기 시작했다. 얇은 책 한 권을 꺼내는데, 영문판 땅끝마을 피네스테라 가이드 북이다. 옛날 사람들이 땅의 끝이라고 생각 했다던 바로 그곳이었다. 이 책을 사긴 했는데 내게 더 필요할 것 같다며 꼭 가보라고 권한다. 난 그곳에 일반 순례자들처럼 버스를 이용할 예정이었으나, 오늘 밤에 일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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