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보다
12월 3일, 밤 10시가 넘은 무렵. 차가운 초겨울의 공기가 도시에 스며들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고요했지만, 그 고요 속에 묻힌 불안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오늘의 사건들은 실시간으로 내 손끝에 닿았다. 매스미디어와 소셜미디어 속에서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확인되고, 우리는 그 속에서 또다시 침묵의 벽을 느꼈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다르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 인식의 격차는 확연히 존재한다.
그날, 내가 떠올린 것은 쇼스타코비치의 레닌그라드 교향곡이었다. 그가 이 곡을 작곡할 때,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고립된 도시에서 폭격과 굶주림 속에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전쟁은 그들에게 매일매일을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게 만들었고, 음악은 그들의 마지막 의지이자 희망의 표현이었다. 그의 심경은 어땠을까? 불안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에 쥔 펜, 그 펜 끝에서 끊어지는 선율이 그가 느낀 두려움과 절망을 그대로 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음악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공포만이 아니다. 그 속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변화에 대한 갈망이 묻어 있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그 시대의 고통과 희망을 엮어낸 작품이지만, 그 음악을 오늘날 우리가 들을 때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실시간 뉴스 속에서 우리는 쉽게 고통과 희망을 분리하려 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결코 떨어질 수 없다.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그 두 감정이 교차하는 지점, 즉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사람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으며, 결국 그것이 음악이라는 형태로 세상에 남게 된다.
오늘의 사건들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쇼스타코비치가 겪었던 그 시간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 우리는 매일 실시간으로 사건들을 접하고, 그 속에서 각기 다른 인식을 가질 뿐이다. 그러나 그 시대와 지금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우리가 그 불안과 공포를 음악이나 글로 풀어내기보다는 소셜미디어 속에서 상반된 목소리들만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목소리는 그 속에서 억눌리고, 그 사이에서 생기는 빈 공간은 결국 더 큰 고독으로 다가온다.
레닌그라드에서 쇼스타코비치가 그렸던 절망과 희망, 변화의 가능성은 여전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 속에서 반복된다. 그는 음악을 통해 그때의 절망을 표현했지만, 우리는 그 음악 속에서 오늘의 희망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잃고 싶지 않은지를 묻는 그 선율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밤은 깊어지고, 나는 그 음악의 선율 속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희망이 우리에게로 다가오지 않을까?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처럼, 그 길 위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질 때까지.
"당신에게 음악은 어떤 순간, 희망이 되어주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