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책의 음악노트 (15) 기돈 크레머의 두 세계

1부 크레메라타 발티카

by 푸른책

시대와 상처, 그리고 한 청자의 기억 속에서 다시 듣는 음악가


1. 따뜻함의 계보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

기돈 크레머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가 누구의 제자인지 몰랐다.
차갑고 투명한 음색, 음표 사이에 스며 있는 서늘한 긴장,
그리고 마치 공기를 가르는 유리날 같은 아티큘레이션.
한동안은 “이 사람에게 스승이 존재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의 스승은 바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소련 음악사의 가장 따뜻한 서정을 품은 인물.
황홀할 정도로 넉넉한 톤,
사람을 감싸는 품격,
그리고 음악 너머의 인간성을 지닌 연주자.



하지만 스승의 온기에서 출발한 제자가
정작 가장 먼 대륙으로 떠나버리듯
전혀 다른 감각을 꽃피웠다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내게 묘한 경외감을 준다.
그 둘의 차이는 단순히 “개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시대가 음악가의 감정 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역사다.



2. 냉전의 공기 속에서 익힌 ‘긴장의 미학’

크래머가 음악적 성장을 시작하던 시절,
동유럽은 차갑게 굳은 시대였다.
검열과 침묵,
정치적 의심과 예술적 고독이
하루도 쉬지 않고 흔들리던 시기.
그런 세계에서 ‘아름다운 선율’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종종 감정의 은폐였고,
진실은 날카로운 긴장 속에서만 살아남았다.



어쩌면 크래머의 서늘한 음색은
그가 살았던 시대가
그에게 부여한 감정의 구조였을지 모른다.
그의 바흐에는
굳건한 구조와 정직한 투명함이 있고,
시벨리우스에서는 얼어붙은 감정의 단면이 드러난다.
쇼스타코비치를 연주할 때의 그는
비극을 감싸지 않는다.
비극의 모양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다.



나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느낀다.
크래머의 해석은 늘
“시대의 공기”를 가시화한다.
그의 연주는 무엇 하나 무심하지 않다.
음 하나하나가
역사적 잔향을 닮았다.



3. 크레메라타 발티카 – 젊은 실험의 집결지

그렇다면 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크레메라타 발티카(Kremerata Baltica) 를 만들었을까?



나는 이 앙상블을 접할 때마다
그가 동유럽 음악가들에게 남겨진
정서적 유산을 다시 하나의 ‘소리 공동체’로 모으려 했다는 생각을 한다.
발티카의 젊은 연주자들은
대부분 소련 해체 이후의 공기를 호흡하며 자랐다.
상처는 줄었지만,
정체성과 역사적 기억에 대한 고민은 더 복잡해진 세대.



크래머는 그 젊은 연주자들과 함께
동유럽의 공기를 음악의 결로 풀어냈다.
바흐를 연주해도
그들의 바흐는 서구식 미려함보다
더 정제된 긴장과 선명한 직선이 살아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말할 것도 없다.
아이러니와 비극,
그리고 절제된 유머가
발티카 특유의 음색으로 다시 태어난다.



나는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크래머가 단원들에게 말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우리가 연주하는 것은 음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삶이다.”


그 말은 지금도 내게 오래 남아 있다.
음악은 결국
연주자의 삶을 거치지 않으면
진짜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크레메라타 발티카는
그의 삶과 동유럽의 역사,
그리고 젊은 세대의 새로운 에너지까지
하나의 결로 묶어낸 프로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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