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파노 바타글리아 – Raccolto

by 푸른책

정동 프란치스코 성당.
정동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갑자기 현실에서 한 걸음 비켜선 듯한 고요가 열리는 곳이다.
도시의 빛과 소음이 일정한 거리에서 멈추고,
겨울의 공기가 돌기둥 사이로 스며들며
성당의 어둠을 더 단단하게 굳혀준다.
붉은 벽돌은 오래된 숨을 품고 있고,
그 위에는 이 계절만이 갖는 조용한 결이 얇게 내려앉는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건축의 음영이
해가 기울고 난 뒤에야 비로소 드러나고,
사람이 없는 시간에는 그 음영이 마치 성당 자체의 마음처럼 느껴진다.



한겨울 저녁, 그 앞을 지나면
도시는 여전히 분주한데도 성당은 다른 시간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의 거리 위에 오래된 시간이 접혀 있는 듯한 느낌.
가로등의 빛은 낮게 떨어져 성당 벽의 일부만을 밝히고,
창문의 곡선은 어둠 속에서 윤곽만 남긴 채
자기만의 깊이를 지켜낸다.
사람이 없을 때 더 아름답다.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돌바닥 위로
겨울의 냉기가 조용히 흘러가고,
그 냉기는 벽돌의 표면을 스칠 때마다
조금씩 다른 온도로 변해간다.
체온이 사라진 공간에서만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온도의 흐름.



그 장면에 스테파노 바타글리아의 Raccolto를 얹으면
공간의 온도 자체가 조용히 바뀐다.
이 음반의 피아노는 ‘연주’라기보다
성당 내부의 침묵에 맞춰 호흡을 고르는 듯한 정적을 갖고 있다.
음 하나하나가 돌바닥 위에 내려앉는 먼지처럼 가늘게 흩어지고,
여백은 성당 안쪽의 어두운 회랑처럼 아무 말 없이 이어진다.
그 깊이는 무겁지 않으면서도 날카롭고,
마치 오래된 고해실의 문이 아주 조금 열려
거기서 나오는 아무 말 없는 숨결이
공기와 섞이며 사라지는 순간을 닮았다.



프란치스코 성당의 겨울은 ‘조용한 빛’의 계절이다.
성당 밖의 찬 공기와 성당 안의 미세한 따뜻함이
문턱에서 곧장 섞이며 만들어내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온도의 차이가 있다.
어둠이라고 해야 할지, 미세한 빛이라고 해야 할지
정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그 경계에서만 생기는 일종의 “공기의 결”이 존재한다.
그 위에 바타글리아의 피아노가 얇고 긴 선으로 가만히 스며들면
성당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악보처럼 보인다.
벽돌과 창틀, 회랑의 그림자가
악보의 줄처럼 보이고,
그 사이로 피아노의 건반들이 천천히 흘러가며
소리가 아닌 여백의 음표를 새겨 넣는다.



정동 성공회 성당이 ‘고요의 축적’이라면,
정동 프란치스코 성당은 분명히 ‘고요의 통로’다.
지나가는 순간조차 침묵의 결이 흐르고,
들리지 않는 음악이 공간 곳곳에서 울린다.
누군가가 방금 전에 자리를 떠난 것 같은 잔향,
하지만 그 잔향 속에 온기가 아닌 냉기가 남아 있는 기묘한 감정.
그 침묵과 여백, 그리고 바타글리아의 건반은
서로 닿지 않으면서도 같은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일종의 조심스러운 병치, 혹은
한 인물의 숨결과 시선이 풍경 속에서 천천히 사라지는 방식.



이 음악을 들으며 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고독하기가 이를 데 없다.
사람이 없는 풍경에서 느끼는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어떤 감정에서 벗어나고 난 뒤에야 마주하게 되는
아주 고요하고 투명한 고독.
Raccolto라는 제목처럼,
내면의 잔단한 조각들이 모여든 뒤
조용히 자리 잡는 감정이다.
그 고독은 잔인하지 않고,
차갑다고도 할 수 없고,
오히려 모든 감정이 발라내지고 난 뒤에 남는
순도 높은 고요함에 가깝다.



클래식 소품을 듣는 것 같은 질서가 있는가 하면,
현대음악의 광기가 미세하게 스치는 순간이 있다.
그 극단적 대비가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분위기로 가라앉을 때
바타글리아의 음악은 독특한 성질을 갖는다.
한 방울의 피도 나지 않게 발라낸 살점처럼
소리는 날카로워지지 않고,
감정은 넘치지 않으며,
잔혹할 정도로 정제된 형태로 남는다.
그래서 이 음악은
풍경을 바꾸지 않고
풍경을 더 깊게 들여다보게 한다.



성당 앞을 지나던 겨울의 저녁.
공기는 차갑고, 시간은 느리고,
사람들은 이미 사라진 풍경 속에서
음악만이 조용히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이미 내면의 화랑을 지나

겨울밤의 집으로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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