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찬란한 스윙의 계절
베니 굿맨, 스윙의 얼굴.
(Public Domain / William P. Gottlieb Collection, Library of Congress)
재즈는 곧
다른 방식의 말을
찾게 된다.
그러나 그 말은
처음부터 날카로운 칼날이 아니었다.
재즈는 먼저
세상에 닿는 법을 선택한다.
더 멀리 닿기 위해
더 쉽게 들리기 위한 언어.
더 많은 몸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말.
그 말이
스윙이었다.
뉴욕은
재즈에게
조직을 가르쳤다.
말을 이어주는 법,
소리를 나누는 법,
여럿이 함께 서는 법.
그렇게 정리된 음악은
처음엔 편안해진다.
안정된 소리는
무대를 넓힌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무대가 넓어질수록
음악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너희가 듣고 싶은 말”을
조금씩 더 많이 하게 된다.
스윙은
그 이동의 이름이다.
스윙은
재즈가 대중에게 굴복한 음악이 아니다.
스윙은
재즈가 대중을 향해
스스로의 문장을 번역한 시간이다.
번역은 늘
어떤 것을 잃는다.
그러나 동시에
전에는 닿지 못했던 곳에
도착한다.
재즈는
스윙을 통해
처음으로
‘도시의 안’에서만 울리던 소리를
‘나라의 밖’으로 내보낸다.
이때부터 재즈는
공기처럼 퍼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순수한 비유가 아니다.
라디오가 있었다.
라디오는
음악에서 장소를 떼어낸다.
클럽의 벽과 천장,
연기와 술 냄새,
눈빛과 소음.
그 모든 것을 벗겨낸 뒤
소리만 전파로 보낸다.
전파를 타는 음악은
더 많은 사람에게 닿는다.
그러나 동시에
더 많은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
스윙은
그 배려의 리듬이었다.
대공황의 시절,
사람들은
불안과 피로를 몸에 품고 살았다.
인간은 불안할수록
생각보다
리듬을 더 필요로 한다.
리듬은
이유를 묻지 않는다.
리듬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리듬은
그저 몸을 움직인다.
스윙은
삶을 이해시키는 음악이 아니라
삶을 버티게 하는 음악이었다.
이 시대의 재즈는
무대 위의 예술이기 전에
댄스홀의 생활이었다.
사람들은
듣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움직이기 위해 모였다.
움직이는 사람들 앞에서
음악은
지나치게 복잡할 수 없었고,
너무 오래 머물 수도 없었다.
여기서부터
재즈의 숨이 조금씩 가빠진다.
음악이
많은 사람의 몸을 붙잡아야 할 때
음악은
자기 호흡을 희생한다.
스윙의 도시들을 떠올려보자.
뉴욕은
조직을 만들고
시장을 열었다.
시카고는
그 시장을 따라가며
연주자들을 길러냈다.
캔자스 시티는
그들로 하여금
긴 밤을 버티게 했다.
그리고 미국의 많은 도시들이
그 소리를
자기 방식으로 소비했다.
스윙은
지역을 지우지 않았지만
지역을 넘어섰다.
재즈가
처음으로
“어디서나 가능한 음악”이 된 순간이다.
이때
밴드리더라는 존재가
전면에 등장한다.
스윙 시대의 얼굴들은
대개 밴드리더였다.
베니 굿맨은
정돈된 빛이었다.
그의 음악은
낯선 사람도 쉽게 따라갈 수 있는
정확함을 가지고 있었다.
대중은
정확함을 사랑한다.
정확함은
불안을 잠시 잊게 해준다.
그러나 재즈의 마음은
언제나 정확함만으로는 살 수 없다.
카운트 베이시는
그 정확함의 반대편에서
다른 정답을 내놓는다.
베이시의 음악은
앞서가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 뒤에 온다.
늦게 시작하는 말,
그러나 끝까지 버티는 말.
그의 밴드가 보여준 것은
완성이 아니라
지구력이었다.
스윙이
“잘 만들어진 음악”이 되기 시작할 때
베이시는
“살아 있는 음악”을 지키려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예술로 끌어올린 사람이 있다.
듀크 엘링턴.
그는
조직을 알았지만
조직의 냉정을 싫어했다.
엘링턴의 음악은
댄스홀이 필요로 하는 리듬을 갖고도,
그 리듬 위에
낮은 어둠을 얹는다.
스윙이 단지 ‘즐거움’이라면
엘링턴은 그 즐거움 속에
‘인간’을 숨겨 넣는다.
그는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말과
음악가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한 무대 위에 놓는 법을 알고 있었다.
스윙 시대는
재즈가 팝이 되어가는 길이다.
하지만
그 길은
재즈가 팝을 ‘낳는’ 방식이 아니라
팝이 재즈를 ‘바꾸는’ 방식에 가깝다.
대중은
재즈를 사랑했지만
대중은
재즈가 어디로 갈지 결정하려 했다.
환호는 따뜻했으나
환호는
항상 방향을 요구한다.
“다음에도 똑같이.”
재즈는 그 말을 들었고
어느 정도는
그 말에 응했다.
그러나 음악이
똑같아지는 순간
음악은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진다.
스윙이 빛나는 이유는
그 순간이
가장 넓게 성공했기 때문이고,
스윙이 불안한 이유는
그 성공이
재즈의 다음 문장을
가려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뉴욕의 ‘조직’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시험이 된다.
조직은
많은 사람을 태우고
강을 건너게 해준다.
하지만 배가 커지면
방향을 틀기 어려워진다.
재즈는
자기 배가 너무 커졌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닫는다.
그리고
그 배에서
조용히 내리려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들은 묻는다.
이 음악이
정말 우리를 말하게 하는가.
이 음악이
정말 살아 있는가.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사람을 위해
너무 친절해진 것은 아닌가.
스윙의 시대는
재즈가 세상을 흔든 시대다.
그러나 세상을 흔든 음악은
언제나 자기 자신도
함께 흔들게 된다.
그리고 흔들림은
대개 두 방향으로 갈라진다.
더 크게, 더 넓게.
혹은
더 작게, 더 깊게.
재즈는
두 길을 모두 지나게 된다.
하나는
대중의 길이다.
재즈는 노래가 되고,
영화가 되고,
라디오의 배경이 된다.
다른 하나는
음악가의 길이다.
작은 방에서
더 빠르고, 더 짧고, 더 날카로운
언어가 준비된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그 칼날의 시대가 아니다.
5부의 스윙은
칼날이 아니라
파도다.
그 파도는
사람들의 몸을 흔들고,
도시의 공기를 바꾸며,
재즈를
세계로 내보낸다.
스윙은
재즈의 최초의 세계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계화의 한복판에서
한 가지 사실을 보게 된다.
음악이 커질수록
음악은 더 조심스러워진다.
조심스러워질수록
음악은 더 빠르게 소비된다.
스윙이 끝나갈 때
재즈는
숨이 찬다.
재즈가 숨이 찬다는 것은
연주가 나빠졌다는 뜻이 아니다.
재즈가 숨이 찬다는 것은
이제
다른 호흡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다음 글에서는
그 새로운 호흡을 위해
재즈가 어디로 향했는지를 따라간다.
한 도시가 있다.
밤이 길고,
연주가 길고,
말이 쉽게 끝나지 않는 도시.
그곳에서 재즈는
먼저 오래 버티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 긴 밤은
결국
더 빠른 말을 준비한다.
— 〈새로 쓰는 재즈 히스토리〉 6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