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 베이커 <Sings, 1956>를 다시 듣는다
재즈를 오래 듣다 보면, 어떤 뮤지션의 소리가 악기 너머로 보일 때가 있다.
쳇 베이커를 들을 때마다 나는 늘 같은 생각을 한다.
이 사람은 ‘어른의 얼굴을 한 큐피드’였다고.
그의 소리는 늘 가볍고, 얇고, 약간은 흐릿한 공기 속에서 떠다녔다.
힘 있게 밀어붙이는 음 하나 없는데도, 듣는 사람의 마음은 정확하게 관통되었다.
마치 큐피드의 화살처럼,
작고 조용하지만 기묘하게 깊은 자리에 박혀버리는 그런 소리였다.
큐피드는 사랑을 주는 신이 아니다.
그는 사랑을 일으키는 신이다.
화살을 쏘면, 맞은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이 생긴다.
하지만 그 사랑이 아름다운지, 파괴적인지, 지속되는지는
큐피드가 책임지지 않는다.
그는 그저 날개를 파닥이며 다음 사람에게로 떠난다.
쳇 베이커도 그랬다.
그는 사랑을 노래했지만, 스스로 사랑을 오래 붙잡지는 못했다.
보컬과 트럼펫은 모두 속삭임처럼 얇았는데,
그 얇음은 결핍에서 온 소리였다.
누군가를 갈망하는데 다 닿지 못하는 사람,
가까워지는 순간 더 빨리 멀어져 버리는 사람.
그 소리는 늘 ‘사랑이 오지 않은 사람’의 음색이었다.
그래서 쳇의 발라드는 유난히 오르페우스적이면서도,
동시에 큐피드적이다.
오르페우스처럼 상실을 노래하고,
큐피드처럼 타인의 가슴에 상실을 일으킨다.
그는 사랑을 완성하지 못했고,
사랑을 부여받지도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듣는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을 남겼다.
그의 삶은 파괴적이었다.
마약, 도주, 반복되는 폭력과 관계의 파탄,
그리고 마지막엔 비극적인 추락.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음악은 늘 달콤했다.
파괴의 삶과 달콤한 음악.
큐피드가 늘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가장 잔혹한 화살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어쩌면 그는 자신이 던진 화살을
가장 많이 맞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를 사랑했고,
그 사랑이 그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그 외로움이 음색을 만들었고,
그 음색이 다시 사람들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이 기묘한 순환.
사랑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계속되는 구조.
그래서 쳇 베이커의 발라드는 늙지 않는다.
늘 같은 자리에서,
누군가의 가슴에 조용히 화살을 꽂는다.
나는 오늘도 그의 음색에서
착한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화살을 겨누는
작은 큐피드를 본다.
그는 결국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한 사랑의 신이었다.
그리고, 그래서 우리는
그의 음악을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