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Sleepless in Kansas
스윙이 세상을 흔들던 시절, 재즈는 가장 넓게 퍼졌다.
라디오의 전파는 도시의 벽을 넘어섰고, 사람들은 같은 리듬을 공유했다. 누군가는 그 시대를 재즈의 황금기라 불렀다. 찬란했고, 확실했고, 어디서든 들려왔다. 음악이 사회의 바깥에 있지 않고, 사회 한가운데로 들어간 순간이었다.
그러나 음악이 사회의 한가운데로 들어갈 때, 음악은 이상한 딜레마를 하나 얻는다.
많은 사람에게 닿는 말은 오래 살아남지만, 오래 살아남는 말은 조금씩 둥글어지는 법이다. 불안한 시절일수록 사람들은 날카로운 질문보다 단단한 박자를 원한다. 삶이 흔들리면 몸은 먼저 균형을 찾고, 그 균형이 리듬이 된다. 스윙은 그 균형의 음악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음악이 균형을 제공하기 시작하면, 음악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살아 있는가. 아니면 잘 작동하고 있는가.
뉴욕은 재즈에게 조직을 가르쳤다. 말이 커지면 자리를 나눠야 하고, 소리가 겹치면 방향을 정해야 한다. 한 사람이 시간을 책임지던 음악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시간을 공유하는 음악으로 바뀌었다. 그 변화는 발전이었고, 필요였고, 재즈가 대중을 향해 확장하기 위한 필연이었다.
하지만 조직은 언제나 두 얼굴을 가진다.
자유를 오래 남기게 해주는 구조인 동시에, 자유를 너무 안전하게 만들어버리는 그물. 그 그물이 촘촘해질수록 재즈는 더 많은 박수를 받았고, 더 많은 무대를 얻었고, 더 많은 기대를 짊어졌다. 기대는 따뜻하지만, 기대는 늘 다음을 요구한다. “다음에도 똑같이.”
그 순간부터 음악은 쉽게 숨이 찬다.
잘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음악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크게.
뉴욕이 늘 하던 말이, 이제 무대 위에서 울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재즈는 다른 방식을 찾게 된다.
그 방식은 처음부터 비밥처럼 날카로운 칼날로 나타나지 않는다. 재즈는 먼저 숨을 쉴 공간을 찾는다. 커진 말이 다시 자기의 결을 되찾으려면, 몸이 먼저 돌아갈 방이 필요하다. 작은 방, 긴 밤, 실패해도 괜찮은 자리.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넉넉한 곳.
그 도시의 이름이 캔자스 시티다.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캔자스 시티를 재즈의 도시로 생각해본 적이 많지 않았다. 재즈를 오래 들었고, 역사를 아는 척도 해봤지만, 캔자스 시티는 뉴올리언스처럼 신화가 되지도 않았고, 뉴욕처럼 산업이 되지도 않았다. 시카고처럼 “사람이 이동하며 만들어낸 이야기”로도 남지 않았다. 이 도시는, 기록보다 밤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더 낯설다.
기록이 적은 음악은 존재가 희미해진다.
존재가 희미하면, 우리는 그 음악이 없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재즈는 원래 그런 음악이다.
특히 비밥 이전의 재즈는 더 그렇다. 곡이 남기보다 공기가 남고, 악보가 남기보다 습관이 남고, 레코딩이 남기보다 서로의 귀에 전해진다. 재즈는 본래 ‘작품’보다 ‘사건’으로 살아온 음악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도시는, 어떤 시대는, 결국 사건으로만 남는다. 캔자스 시티가 그렇다.
캔자스 시티는 지리의 중심이 아니라 시간의 중심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연주했는가”보다 “얼마나 오래 연주할 수 있었는가”다. 음악이 길어지는 도시. 밤이 쉽게 끝나지 않는 도시. 그 말은 낭만이 아니다. 밤이 길다는 것은 늘 정치와 돈이 허락했다는 뜻이고, 관리와 단속이 느슨했다는 뜻이며, 삶의 피로가 그만큼 밤으로 밀려 들어왔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음악이 단지 아름답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음악은 기능을 가진다.
사람을 붙잡고, 사람을 버티게 하고, 사람을 잊게 한다.
그런 공간에서 연주자는 달라진다.
뉴욕에서는 곡이 끝나는 시간이 중요했고, 무대가 다음 순서로 넘어가야 했으며, 연주는 일정 속에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캔자스 시티에서는 일정이 느슨해진다. 즉흥은 갑자기 “여유”를 얻는다. 그리고 여유는 음악에 가장 잔인한 질문을 하나 던진다.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가.
대답은 단순했다.
더 오래 말하자.
끝까지 버티자.
캔자스 시티의 밤에는 보이지 않는 링이 있다.
연주자들은 그 링 위에 올라가 서로를 시험한다. 누가 더 빠른가가 아니다. 누가 더 화려한가도 아니다. 누가 더 오래 자기 말을 유지할 수 있는가. 누가 더 오래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즉흥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체력의 문제가 된다. 손의 근육, 호흡의 길이, 집중의 지구력. 그리고 자존심의 체력.
이 도시의 음악은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반복은 가난한 음악의 증거라고들 하지만, 반복은 종종 가장 강한 설득의 방식이 된다.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말하면서, 조금씩 다른 표정으로 바꾸는 것. 같은 재료로 다른 얼굴을 만드는 것. 반복 속에서 변주가 태어나고, 변주 속에서 사람은 ‘다음’을 기다리게 된다.
바로크가 낮은 음을 반복하며 세상을 올려 세웠듯, 캔자스 시티의 재즈도 반복 위에 밤을 세운다. 중심은 단단히 붙들고, 위에서 말이 조금씩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매끈하지 않아서, 오히려 살아 있다. 완벽하게 닦인 소리는 곧 규격이 된다. 규격은 안전하지만 몸의 흔들림을 지운다. 캔자스 시티는 그 흔들림을 지우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려함이 아니라 지속이다.
그리고 지속을 예술로 바꿔낸 인물이 있다.
카운트 베이시.
베이시는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는 앞에 나서서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뒤에서 시간을 잡는다. 언제 들어가고 언제 빠질지, 언제 비워두고 언제 채울지. 그 감각은 연주보다 더 큰 리더십이 된다. 밴드는 리더의 연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리더의 시간감각으로 움직인다.
베이시의 밴드에서는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누구도 과장하지 않는데, 음악이 점점 뜨거워진다.
누구도 떠들지 않는데, 밤이 점점 길어진다.
말이 많지 않은데, 사람은 더 오래 남는다.
이것이 캔자스 시티의 미학이다.
많이 말하는 대신 남겨두는 것.
완성 대신 진행을 택하는 것.
정답 대신 지속을 택하는 것.
그리고 그 지속은 결국, 재즈를 다른 곳으로 밀어낸다.
길어진 밤은 언젠가 압축을 요구한다.
오래 이어진 문장은 어느 순간, 핵심만 남기고 싶어진다.
끝까지 말해본 사람만이, 짧게 말할 수 있다.
캔자스 시티는 비밥을 발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밥을 가능하게 한 몸을 만들었다.
그 속도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 속도는 이 긴 밤의 체력과, 반복의 집요함과, 끝까지 버티는 자존심에서 나온다.
그래서 캔자스 시티의 밤은 끝나지 않았지만, 결국 다음으로 이어진다.
더 작은 방으로. 더 빠른 말로. 더 날카로운 언어로.
다음 글에서 재즈는 마침내 속도를 발명한다.
말은 짧아지고, 한 순간은 무거워지며, 음악은 대중의 무대에서 음악가의 방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방에서 재즈는, 누구에게도 빌리지 않은 문법으로 자기 자신을 다시 쓸 것이다.
— 〈새로 쓰는 재즈 히스토리〉 7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