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재즈 히스토리] 전기를 입은 야수

15부 퓨전 재즈의 탄생

by 푸른책

자유가 모든 소리를 허락한 뒤, 재즈는 다시 한 번 질문을 받는다.
그 소리는 어디까지 커질 수 있는가.
그리고 더 정확히는, 어떤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프리 재즈와 아방가르드는 소리의 경계를 허물었다. 무엇이 음악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생겼다. 이 음악은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닿을 것인가. 자유는 확보되었지만, 그 자유가 머무를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재즈는 다시 선택해야 했다.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바깥으로 몸집을 키울 것인가.



이때 재즈 앞에 놓인 환경은 이전과 전혀 달랐다. 변화의 핵심은 미학이 아니라 기술이었다. 전기공학의 발달은 음악이 만들어지고 전달되는 방식을 근본에서 바꿔놓는다. 이제 음악은 단순히 소리를 “내는” 일이 아니라, 소리를 증폭하고, 조절하고, 배치하는 기술의 문제로 바뀐다.



전기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 음악의 권력은 물리적 음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큰 홀과 시끄러운 공간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연적으로 소리가 멀리 나가는 악기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재즈는 관악기의 음악이었다. 트럼펫과 색소폰, 트롬본과 드럼. 이 악기들은 미학적 선택 이전에 환경적 선택이었다. 들리지 않으면 즉흥은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이크와 앰프, 스피커 기술이 안정화되면서 상황이 바뀐다. 소리는 더 이상 악기의 몸집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작은 소리도 키울 수 있고, 긴 음도 유지할 수 있으며, 미세한 뉘앙스조차 공간 전체로 퍼뜨릴 수 있다. 이 변화는 음악의 중심을 이동시킨다. 폐활량에서 전기 신호로, 물리적 한계에서 시스템의 설계로.



이 순간부터 재즈의 권력 구조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부차적이던 악기들이 전면으로 등장한다. 전기 기타는 단순한 리듬 악기를 넘어 질감과 지속을 다루는 주역이 되고, 전기 피아노는 공간을 채우는 새로운 방식의 중심이 된다. 콘트라베이스는 일렉트릭 베이스로 대체되며, 리듬은 움직임이 아니라 그루브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이 변화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 환경이 허락한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보컬 역시 같은 변화를 겪는다. 마이크의 발달은 노래하는 법 자체를 바꾼다. 더 크게 부를 필요가 없어지고, 속삭임도 하나의 전달 방식이 된다. 이는 단순한 표현법의 변화가 아니라, 음악이 청중에게 닿는 거리의 변화다. 음악은 무대를 장악하는 존재에서, 귀 안으로 직접 들어오는 존재가 된다.



이 모든 변화는 재즈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록 음악은 이미 이 새로운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비트, 증폭된 사운드, 신체를 직접 자극하는 에너지. 음악은 더 이상 귀로만 듣는 대상이 아니라, 몸으로 경험하는 사건이 된다. 재즈가 이 세계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미학적 순수함을 지키는 선택일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현실과 단절되는 선택이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다시 등장하는 인물이 마일스 데이비스다. 그는 언제나 재즈의 가장 위험한 순간에 서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늘 옳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늘 먼저 위험을 감수했다는 점이다. 퓨전의 탄생 역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더 이상 이전의 언어로는 지금을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비롯된다.



마일스는 록 음악의 에너지를 모방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관찰한다. 반복되는 리듬이 만들어내는 지속성, 전기 악기가 만들어내는 밀도, 증폭된 소리가 바꾸는 공간 감각. 그리고 이 요소들을 재즈의 즉흥성과 결합시킨다. 이 결합은 조심스럽지 않다. 오히려 과감하고, 때로는 난폭하다. 이 시도의 결정체가 바로 <Bitches Brew>다.



이 음반은 등장과 동시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온다. “그것은 더 이상 재즈가 아니다”라는 비난은 단순한 보수적 반응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 음악은 기존의 재즈와 너무 달랐다. 곡은 길어졌고, 구조는 느슨해졌으며, 솔로의 개념도 바뀌었다. 즉흥은 한 사람의 차례가 아니라, 집단적 소용돌이가 된다. 음악은 전개되기보다 끓어오르고, 설명되기보다 휩쓸고 지나간다.



그러나 이 혼란은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재즈가 처음으로 대중문화의 한복판에 들어선 사건이었다. 퓨전 재즈는 재즈를 대중화한 음악이 아니라, 재즈가 대중문화와 같은 공간에서 숨 쉬기 시작한 결과였다. 클럽이 아니라 대형 공연장, 소규모 앙상블이 아니라 거대한 밴드 편성. 재즈는 이 순간, 자신의 체급을 바꾼다.



전기의 도입은 음색만을 바꾸지 않는다. 그것은 음악의 시간 개념을 바꾼다. 짧은 즉흥 대신 긴 흐름, 순간의 기지 대신 체력과 집중력. 음악은 더 이상 재치의 싸움이 아니라, 버텨내는 행위가 된다. 이 변화는 불편하다. 이전의 정교함과 균형이 사라진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편함은 타락의 징후가 아니라, 환경 변화에 대한 정직한 반응이다.



퓨전 재즈를 향한 비난은 결국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재즈를 가능하게 했던 조건이 사라졌다는 인식. 그러나 재즈는 언제나 조건과 함께 변해온 음악이었다. 스윙이 춤을 선택했듯, 비밥이 사고를 선택했듯, 퓨전은 기술 시대의 생존을 선택한다. 다만 그 방식이 이전보다 훨씬 크고, 훨씬 시끄러웠을 뿐이다.



퓨전 재즈는 재즈의 끝이 아니다. 그것은 재즈가 스스로를 실험실에서 꺼내어, 세계의 소음 속으로 던진 사건이다. 순수함을 잃은 것이 아니라, 순수함이라는 개념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순간. 어떤 소리가 순수하고, 어떤 소리가 타락했는가. 전기와 비트가 들어온 순간, 재즈는 이 질문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된다.



야수는 전기를 입었고, 그 몸집은 커졌다. 움직임은 둔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대신 더 많은 공간을 차지했다. 퓨전 재즈는 재즈를 다시 한 번 위험한 음악으로 만든다. 이해하기 어렵고, 통제하기 힘들며, 때로는 과도하다. 그러나 바로 그 과도함 덕분에, 재즈는 다시 살아 움직인다.



다음 글에서 우리는 이 거대한 몸집 이후의 세계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퓨전 이후, 재즈는 더 이상 하나의 중심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대신 여러 갈래로 흩어지며, 각자의 방식으로 이 전기의 시대를 살아간다. 전기를 입은 야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다만, 더 많은 숲으로 들어갈 뿐이다.



— 〈새로 쓰는 재즈 히스토리〉 16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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