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부|ECM과 유럽 재즈, 가장 깨끗한 즉흥의 탄생
소리가 커진 뒤에는 반드시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이렇게까지 말해야 하는가.
이렇게까지 채워야 하는가.
퓨전 재즈는 재즈의 몸집을 키웠고, 전기와 비트는 음악을 다시 거리로 끌어냈다. 재즈는 한때 잃어버렸던 대중성을 되찾았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미세한 뉘앙스, 음과 음 사이의 여백, 연주자가 멈추는 순간의 공기. 모든 것이 증폭되었을 때, 재즈는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무엇을 더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뉴욕이 아니라 유럽에서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도시의 소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 공간에서. 숲과 호수, 안개와 눈, 그리고 울림이 오래 남는 장소들. 유럽 재즈의 부상은 하나의 스타일 유행이 아니라, 재즈가 스스로의 환경을 다시 선택한 사건이었다.
이 전환의 중심에는 ECM Records가 있다. ECM은 단순한 레이블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에 가까웠다. 이곳에서 음악은 클럽의 소음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음악은 침묵과 함께 존재하도록 설계된다. 그래서 이 레이블의 음악은 늘 ‘조용하다’고 오해받지만, 실제로는 소리가 가장 또렷하게 들리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ECM의 사운드는 기술적이다. 그러나 그 기술은 전면에 나오지 않는다. 녹음은 정교하고, 잔향은 계산되어 있으며, 악기의 위치는 치밀하게 배치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과시되지 않는다. 기술은 음악을 떠받치는 바닥이 되고, 연주자의 호흡을 확대하는 도구가 된다. 이 지점에서 테크네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 어떤 세계관이 소리를 다루는 방식이 된다.
이 미학을 가장 상징적으로 구현한 인물이 키스 자렛이다. 그는 미국 재즈의 언어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 연주자였지만, 동시에 그 언어를 최소한으로 사용하려 했다. 그의 즉흥은 화려한 전개보다 지속되는 집중에 가깝다. 음은 많지 않고, 변화는 급격하지 않다. 그러나 그 안에는 미세한 감정의 이동과 호흡의 흔들림이 촘촘히 배치되어 있다.
자렛의 연주에서 중요한 것은 음의 수가 아니라, 음이 놓이는 자리다. 그는 소리를 앞세우지 않는다. 먼저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소리를 놓는다. 이 태도는 재즈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경쟁적 즉흥과는 다른 방향이다. 누가 더 많이, 더 빠르게 말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는가의 문제로 즉흥을 바꾼다. 이 지점에서 재즈는 처음으로 ‘속도를 늦춘 채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
유럽 재즈의 또 다른 얼굴은 얀 가바렉이다. 그의 색소폰 소리는 전통적인 재즈의 음색과 다르다. 거칠기보다 투명하고, 밀도보다 여백이 앞선다. 이 소리는 도시의 밤보다 북유럽의 새벽과 잘 어울린다. 블루스의 어법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고독과 거리, 넓은 풍경을 암시한다.
가바렉의 음악에서 즉흥은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풍경에 대한 반응에 가깝다. 소리는 공간을 채우기보다 통과하고, 멜로디는 주장을 하기보다 떠다닌다. 이 음악은 미국 재즈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낯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재즈가 약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환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 흐름에는 테르예 립달(Terje Rypdal), 아릴드 안데르센(Arild Andersen), 보보 스텐손(Bobo Stenson)과 같은 연주자들도 함께한다. 이들은 록과 클래식, 민속 음악의 어법을 자연스럽게 흡수하며, 재즈를 하나의 ‘순수 장르’가 아니라 열린 언어로 다룬다. 즉흥은 전통을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다양한 어법을 연결하는 접점이 된다.
이 지점에서 Blue Note Records와의 대비는 분명해진다. 블루노트의 재즈는 도시의 압력을 전제로 한다. 클럽의 공기, 밤의 소음, 사회적 긴장. 이곳의 음악은 늘 ‘지금’을 산다. 리듬은 앞으로 밀고, 솔로는 자신을 증명하며, 음악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딪힌다. 블루노트의 즉흥은 생존의 언어다.
반면 ECM의 즉흥은 머무름의 언어다. 이 음악은 도시를 떠난 것이 아니라, 도시와 거리를 두는 방식을 선택한다. 여기서 즉흥은 경쟁이 아니라 응답이 되고, 연주는 주장보다 관조에 가까워진다. 기술은 완벽하지만 드러나지 않고, 감정은 절제되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세계가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ECM의 연주자들 대부분은 블루노트의 언어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고, 블루노트의 연주자들 역시 ECM의 미학을 의식하고 있었다. 차이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현실을 음악의 전제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었다.
ECM과 유럽 재즈의 부상은 재즈가 처음으로 자기 문화의 중심을 벗어난 사건이다. 이는 단순한 지역 이동이 아니라, 재즈가 하나의 세계 음악이 되기 시작한 징후다. 미국의 역사와 직접 맞닿지 않은 연주자들은, 그 부담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들은 재즈를 정체성의 투쟁이 아니라, 표현의 언어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 음악에는 분노보다 관조가 많고, 속도보다 깊이가 앞선다.
16부의 재즈는 반동이 아니다. 퓨전에 대한 도피도 아니다. 그것은 재즈가 자신에게 허락한 또 하나의 가능성이다. 소리를 키우는 법을 배운 뒤, 다시 줄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 이 두 선택은 대립하지 않는다. 서로를 보완한다. 재즈는 이 두 세계를 모두 품을 수 있을 만큼, 이미 충분히 넓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 분화 이후의 세계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중심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고, 재즈는 각자의 방식으로 현재를 감당한다. 어떤 음악은 다시 도시로 돌아가고, 어떤 음악은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간다. ECM과 유럽 재즈는 그 숲의 가장 또렷한 지점이다. 재즈가 조용해질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그 조용함이 결코 약함이 아니었음을 증명한 세계다.
— 〈새로 쓰는 재즈 히스토리〉 17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