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의 여운)
내가 나를 바라본 내 모습. 무수한 인연들과 만남 속에서 비춰진 나를 떠올리며 나의 존재를 확인해본다. 아름다운 모습과 추한 모습의 나를. 내가 감당해야 할 목소리들이 가깝게 속삭이는 듯하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아름다운 뒷모습이 될 것이라고.
하루에도 수많은 만남을 통해 살고 있다. 그저 스치며 무의미하게 사라지는 것 같아도 사라짐 속에는 이미지를 남긴다. 그림자 같은 영상들.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으로 들어와 어떤 모습과 형상을 만들어 치환시켜 갈 것이다. 스쳤던 이미지가 무엇으로 남겨졌는가. 긴 여운을 남겨준 무수한 인연들의 뒷모습을 생각해본다.
식물의 한해살이를 떠올려보았다. 그들의 처음과 끝의 존재감을. 시작은 너무 심오하고 오묘한 조화를 이루어 그 깊이조차 가늠할 수 없다. 신비 자체다. 하찮게 여기는 길거리의 풀 한 포기도 신의 걸작이니까. 한겨울 모진 추위를 견디며 대지를 뚫고 연초록 옷을 입은 새순이 봄을 선보이면서 자연의 위대함이 시작된다. 위풍당당 행진곡의 서막처럼. 차츰 무성하게 우거진 녹음 터널을 지나 화려한 단풍으로 절정을 이루다가 낙엽으로 삶을 마감하는 저들의 한 시절. 찬란했던 계절은 찰나처럼 속절없이 지나가고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면서 남겨진 흔적들을 사유하며 내 삶을 어떻게 대입해 볼 수 있을까.
내가 남긴 뒷모습의 여운은 무엇을 대변하는지. 내 원초적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숨을 바라보았다. 들숨 날숨을. 이들의 나직한 정체를 따라가 본다. 미세한 숨의 들락거림을. 마치 파도치는 물결을 닮은 것 같다. 내 마음이 편할 때는 한없이 평온하고 부드럽다가 사악할 때는 성난 파도처럼 무섭게 회오리치며 사방을 삼킬 듯 거칠어진다. 숨결 따라 내 안의 나를 확장해본다. 내가 딛는 발걸음은 어떤 그림자를 남기고 있을까. 하루에도 수만 가지 만나는 것들의 자취를 떠올려보았고, 순간 속으로 사라지는 말과 숨의 정체를 되새겨보았다. 해서 나란 존재의 정체성을 찾으며…….
얼마 전 학창시절 친구를 만났다. 옛 추억을 소환하며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유영한 시간. 세월이 흘러서인지 얼굴과 생각은 천양지간이었다. 갈수록 대화 분위기는 통속적 이야기로 흘렀다. 사소한 얘기들. 재테크, 외모 가꾸기. 가족 얘기, 주로 자랑과 험담거리였다. 마침 멍석 깔아놓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걸쭉한 입담들. 처음과는 다르게 만남도 서서히 지루함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도 누군가처럼 슬며시 귀갓길을 서두르며 헤어졌다. 이상도 했다. 학창시절엔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헤어지기가 아쉽기만 했는데, 이런 허전함은 무엇인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머릿속은 온통 오늘 대화들로 꽉 찼다. 뿌듯함 대신 공허함이 몰려왔다. 삶의 이정표가 달라서인지 공감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허전함으로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요즘 코로나로 일상을 제한받다 보니 새삼 과거 뒷모습들이 애틋하게 다가온다.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랫말이 크게 다가오면서 풍수지탄(風樹之嘆)이란 고사성어도 떠오른다. 지나온 시간들을 후회하지 말고 살아가라는 이야기이며, 뒷모습을 아름답게 남겨야 한다는 말이리라. 갈 길이 아직도 멀었나 보다. 지금도 많은 시행착오를 일으키며 현재의 소중함을 잊고 영원할 것처럼 착각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아차, 하면서 연신 후회의 되돌림을 번복하는 나였으니.
오래전 본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가 생각난다. 난 영화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닌데 유독 그것은 뭉클한 감동으로 가슴속 한 권의 소중한 책처럼 내 영혼을 성숙시켜 주었다. 남아프리카 수단, 오지의 열악한 환경에서 봉사하는 이태석 신부의 눈물겨운 헌신 이야기다. 극도로 피폐한 삶의 현장에서 그들과 동고동락하며 아름다운 삶을 실천했던 사람. 성자 같은 그를 보며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영화관 옥상에 올라가 한참을 울었다. 아직도 한센병환자의 뭉그러진 발을 위해 특수 제작한 신발을 손수 만들어 준 영상이 눈앞에 선하다. 그는 매 순간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인간적인 갈등을 느낄 때마다 신에게 질문하곤 했단다. 삶의 매 순간, 굽이 돌아가는 길에서 그분이라면 뭐라고 말씀하실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오롯이 신의 음성을 듣고 따라 행동했다니까. 수단의 슈바이처이신 신부님은 아쉽게도 사십 중반에 신의 부르심을 따라 먼 하늘로 돌아가셨다. 고귀한 분들의 발자취가 내겐 더욱 그윽한 향기로 남았다. 그들이 남긴 뒷모습은 내 삶의 터닝포인트로 큰 울림이요 반향이었기에.
며칠 전 장미공원을 산책했다. 추운 겨울을 그들은 어떻게 지낼까 문득 생각이 났다. 한 시절 황홀한 빛깔로 사람들의 발길을 단단히 붙들던 그곳. 세계의 장미들이 다 모인 듯 전시장을 방불케 하며, 수많은 종자로 선보였던 곳이었다. 짚으로 야무지게 얼지 않도록 단단하게 덮여있어 고마웠다. 사방에 고층 콘크리트 건물 속에 누런 볏짚으로 덮여있는 이색풍경이 초가집처럼 정겨웠다. 볏짚으로 이엉을 얹은 내 어릴 적 고향집이 불현듯 생각나 추억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인기척을 했다. 지인이었다. 두터운 겨울옷으로 무장을 하고 더욱이 마스크까지 했는데 쉽게 알아보다니. 그녀는 뒷모습이 영락없이 나라고 생각했다는 말을 곁들였다. 나의 이미지와 뒷모습이라는 말에 놀라웠다. 순간, 내 가슴은 철렁했다. 잘못한 일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뒤가 켕기는 일은 없었는지. 평소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을까. 생각이 스치면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도 동시에 떠올랐다. 다행이다. 좋은 인연의 지인여서 안도했다. 이제부터 나도 평소 품행을 단정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아름다운 사람으로, 좀 향기로운 기억으로 남게 되도록 행동해야겠다고.
사람의 아름다운 뒷모습은 얼마나 숭고한 자태인가. 숨길 수도 감출 수도 없다. 그런 삶의 여운은 정녕 아름다운 삶의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희망을 노래하고 살맛 나는 세상으로 인도해 주리라. 화장하고 꾸민 앞모습이 아니다. 겉치레의 미소를 머금지도 못한 솔직한 뒷모습이 아닌가.
또한 나의 삶을 통해서 수시로 자문해 봐야 하겠다. 양심을 거르는 행동들은 내 뒷모습을 가끔 초라하게 만들기에, 스스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니까. 바로 평정심을 찾아가는 일이다. 안심할 수 있는 자아를 성장시키는 과정이기에. 내 주변에 가족과 지인들, 특히 내가 남긴 말과 언행은 더없이 중요하다. 그것은 함께 사는 동안 선한 영향을 주고 정직하게 살아야 할 이유이기에.
책상 앞 벽에 걸린 사진 몇 장이 유독 눈에 띈다. 모두 카메라를 향해 멋진 포즈를 취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힘껏 과시하고 있었다. 브이 손가락, 하트 만들기 표정, 온갖 폼으로 뽐내면서. 하지만 나란히 앉아 뒤통수만 보이는 사진에 유독 눈길이 갔고, 자꾸 호기심을 유발해주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얼굴 표정은 어떨까. 기분은 좋은지, 온갖 궁금증을 더해가며 상상의 나래를 폈다. 아하, 뒷모습은 알 수 없는 호기심 속에 미덕으로 남는 것인가. 그렇다. 보이는 모습 너머의 배려와 후덕함이 아닐까.
골목길을 걷다 보니, 어느 집 앞 나목에 걸려있는 주홍빛 감이 처연하게 매달려 있었다. 앙상한 가지에 붉은 열매는 단박에 눈길을 끌었다. 선명함이다. 늦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 무채색의 가지 위에 잘 익은 두 개의 감. 주홍색의 선명함은 예사롭지 않았다. 왜 그대로 두었을까. 새들을 위함인지 아니면 사람을 위한 배려인지. 주인의 인정이 함께 걸려있는 듯. 푸근하게 다가와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나의 마지막 뒷모습도 저렇게 남겨진 잘 익은 감처럼 누군가에게 아름다움을 남겨주고 싶다.
이젠, 속절없이 빠른 세월만 탓해서도 안 되겠다. 어차피 모든 인연들도 가고 오는 계절과 같은 것. 고운 흔적의 뒷모습을 남기고, 아쉬움 없이 떠났으면 좋겠다.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저 감처럼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싶다. 소원의 등불을 밝히는 심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