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마음자리 10화

새로운 경험으로의 초대

당신을 통해 나를 봅니다.

by 한꽂쌤

그녀는 오늘 기분이 몹시 좋지 않다. '그 사람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라는 말부터 꺼내는 그녀는 매우 화가 난 듯 보였다. 이유를 들어보니 남자 친구가 자신에게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연인관계가 되어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깊은 관계가 되면 애정의 깊이만큼 기대감도 상승한다. 좀 더 자신을 챙겨주기를 바라고 좀 더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란다. 그녀 또한 남자 친구로부터 적극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는 연애를 원하지만 좀처럼 남자 친구는 기준 미달인 모양이다. 그녀의 부모님은 장녀인 그녀에게 '동생들을 잘 돌봐라'는 요구가 많았다. 동생 두 명은 그녀와 나이 차이가 있어서 동생들과 즐겁게 논 기억보다는 동생들 챙기느라 바빴다. 친구들과의 약속도 제대로 잡지 못해 속상했던 경험이 더 많았다. 그녀는 바쁜 부모를 대신해 지속적으로 동생들의 보모 역할을 해야 했고 그 역할에 충실해야만 부모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생각하는 한 그랬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어떤 대상이 이유 없이 거슬리는 이유'를 살피다 보면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라고 하였다. 자신과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탐색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내 안에 있는 심리 내적 요인이 상대방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녀가 느끼기에, 부모님은 자신이 동생들의 보호자 역할을 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역할을 거절했을 때 '너는 나쁜 아이' '이기적인 아이'라는 말을 할 것만 같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녀의 부모는 자녀로서의 자신이 아닌, 역할 기능자로서의 모습을 원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남자 친구를 만나 사귐을 시작했을 때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 기뻤고, 자신을 존중해주는 태도에 고마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관계는 일방적일 수가 없다. 사랑을 주기도 하지만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자 친구에게 사랑받을 때는 기뻤지만 남자 친구가 자신에게 사랑을 달라는 태도를 보일 때면 긴장된다고 하였다. 남자 친구에게 자신이 뭔가를 해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기분이 상하게 되어 많이 지친 모양이다.


"사랑하는 데 왜 뭔가를 해주기를 바라죠?"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앉아있다. 그녀는 아직 부모님에 대한 기억 속 메시지로부터 독립을 하지 못한 듯 보인다. 부모가 자신에게 보모 역할을 요구했듯 타인이 자신에게 어떠한 역할을 요구하는듯한 느낌이 그녀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불만이 생기기 시작하면 자신 안에 머물고 있는 원가족과의 패턴을 살펴보자. 어린 시절 자신을 힘들게 했던 '요구적인 부모상'이 관계를 통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지배해버린 내면화된 부모의 메시지가 그녀가 관계를 맺는 모든 대상을 통해 재연되고 있다. 그 순간 그녀 본연의 모습은 모두 추방되고 만다. 내 모습이 추방된 채 타인과 관계를 맺다 보면 상대방에 대한 거부감이 조금씩 올라온다. 이러한 거부감, 불편감을 방치하다가 결국 관계를 단절해야겠다는 생각에 다다르기 일쑤다. '관계를 그만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마음을 가다듬고 나 본연의 색으로 돌아가 볼까'라고 의식적인 환기를 시켜주면 좋다.


그녀는 역할 요구에 익숙하다. 부모가 늘 그랬던 것처럼 남자 친구의 요구적인 모습에 마음이 걸린 채 휘청이고 있다. 어쩌면 남자 친구의 모습은 그녀가 느끼는 것에 비해, 그다지 요구적이지 않고 연인관계에서 있을법한 흔한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 단지 그녀가 부모로 인해 내면화된 미해결 된 마음이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서 드러났을 뿐. 남지친구로 인한 불편감이 객관적으로 볼 때 타당한 감정인지, 유독 자신에게만 드러나는 감정인지 살펴볼 일이다.


남자 친구와 헤어져 버린다면 더 이상 이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 끝내면 그만일 거라는 태도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부모가 자신에게 바랬던 장녀의 역할을 거부할 수 없었던 무기력감을 남자 친구에게도 똑같이 재연하게 되는 이치다. 남자 친구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에 대해 솔직한 마음을 전하고 남자 친구의 의향을 묻게 된다면 상황을 역전될 수 있다. 그녀가 차마 하지 못하는 '있는 그대로의 마음 표현하기'를 한다면 '내가 내 마음을 표현해도 되는구나'라는 새로운 긍정적 경험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의 '너는 장녀로서 책임을 다하는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해'라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싫어'라고 말하는 거 자체가 두려움과 죄책감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속상하고 불편한 마음은 구석 한편에 넣고 해야 할 역할에만 충실해왔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약했을 때 경험했던 감정에 취약하다. 지금은 굳이 그런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는 힘을 가졌음에도 그 힘을 신뢰하지 못하거나 힘을 써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관계를 끊어버리는 극단적인 태도가 나타난다. 시도한다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릴 때 내 모습처럼 지금의 나도 그때와 같을 것 같은 마음이 꽉 차 있기에 그 두려움을 마주하기가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열고 상대방과 소통을 시도한다면 또 다른 경험이 누적되는 절호의 찬스다. 단절하고 싶은 느낌이 강력하게 올라올 때 '이 이건 기회다. 또 다른 나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다'라고 생각하면 좋다.


상대방을 떠나면 이 불편한 마음도 끊어낼 거라는 생각은 일찌감치 내려놓아야 한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지금 당신이 이 허들을 넘어가지 못하면 다른 관계에서도 또다시 맞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나의 태도, 느껴지는 감정은 새로운 경험으로의 초대에 당신이 응한다면 기꺼이 바뀔 것이다. 어린 시절 경험했던 관계가 무난하고 만족스러웠다면 지금 겪고 있는 관계 경험도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흔하지 않다.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불편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면 직감해야 한다. '아 내가 지금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이 올라오고 있구나 뭘까?' 이러한 감지센서를 민감하게 알아차린 사람은 관계 경험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의 허들을 넘고 나면 그다음 허들은 '이 정도면 넘을 수 있어'라는 자신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지금 내 눈앞에 놓인 작은 허들을 넘지 못하고 치워버린다면 당신은 다시 똑같은 허들을 경험해야 한다. 새롭게 시작된 연인관계, 동료관계, 친구관계, 자녀관계 등을 통해 끊임없이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다면 그 마음을 표현해보자. 조심스럽고 정중한 당신의 이러한 태도를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아 이 사람은 진정성이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어필될 수 있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고 표현하고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당신이 넘을 수 없을 거라 여기고 치워버린 어릴 때의 느낌을 치유받을 수 있다. 그러한 치유 과정은 용기 있는 당신만이 맛볼 수 있는 당신 자신이 되는 경험이 된다.


당신에게 당신 자신이 되는 경험을 제공한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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