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선(線)이 필요한 시간

by 한꽂쌤

마음의 선(線)이 필요한 시간


함께 있으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 춤추게 하라.


‘함께 있으되 거리를 두라’ 중에서 - 칼릴 지브란-


대부분의 심리적인 문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쳐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격장애는 그 사람의 성격이라는 이유로 사라지거나 변하기가 어렵다. 절대 불가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심리장애에 비해 접근이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DSM-5에서 성격장애를 크게 3개의 군(A군, B군, C군)으로 나누고 있는데 그중 B군에는 경계선(성) 성격장애(경계선 인격장애)가 있다. 경계성 성격장애는 타인과 자신에 대한 좋거나 싫음이 너무 극단적이거나 충동적이어서 그 정서가 매우 불안정한 특징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 친구, 나와 결혼한 배우자,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버림받을까 봐 비굴하게 매달리다가 갑자기 반대로 폭언과 폭행을 일삼기도 한다. 상대방을 자기 곁에 붙잡아두기 위해 극단적 시도를 일삼기도 하는데 자살이나 자해를 시도하기까지 한다. 보통은 생각하기에 ‘일반적으로 이럴 수 있을까?’라고 여겨지기도 하겠지만 이런 행동을 시도하는 이들은 순간의 감정에 압도되어 판단력을 잃고 잠시 동안이지만 망상과 해리 증상까지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경계성성격장애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적으로 선(線) 지키기에 미숙하다. 나는 오랫동안 상담심리분야에 머무르면서 ‘선(線)을 지키면 누구도 아프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을 해왔다. 지나치게 타인에게 다가가는 사람, 지나치게 타인이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는데도 침묵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경우를 흔히 보았기 때문이다. 속 마음은 거절하고 싶은데 ‘좋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온 경우를 경험한 적 있는가? 이러한 경험의 이면에는 자신의 욕구보다 타인의 욕구를 우선적으로 생각함으로 인한 결과이다.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에 뛰어들어 조언이라는 명목으로 간섭하고나 훈수를 두는 경우도 흔하다. 또 다른 경우는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데 서툴러서 많은 일들을 혼자서 끙끙거리며 해내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 또한 적절한 선(線) 지키기에 서툰 경우이다.


보웬이라는 심리학자는 건강한 경계선의 예를 가족 간의 관계에 있어서 ‘자아 분화’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자아 분화란 개인이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에 의해 기능함으로써 자신과 타인 간의 관계에서 분화가 원활한 것을 말한다. 자아가 분화된 사람들은 불안이나 스트레스 상황에서 지적 과정과 감정 과정을 분리시켜 충동적이지 않다. 즉, 자신만의 가치, 주도성에 의해 사고하고 계획하며, 반응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융합적인 사람들은 자아의 분화가 미흡하여 타인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거나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노력하는 과정 내내 불안하여 자율성이 떨어지고 의존적이며 비합리적 사고에 의해 상황을 바라보고 결정한다. 결국 불안이 높은 이유 중 하나는 자아 분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로 볼 수 있다.


마음의 선(線)이 적절하게 형성된 사람의 특징과 자아 분화가 잘 된 사람의 특징은 유사하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경계가 잘 유지되고 있으며 자신에게 주도권이 있어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경계가 건강한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영역과 타인의 영역을 잘 구분한다. 무분별하게 경계를 넘나들다가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를 헤칠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윤택한 삶을 지속할 수 있다.

나는 형제가 많다. 내가 막내로 태어났을 때 엄마는 40을 앞둔 나이였고 늘 신체적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내던 분이셨다. 아마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를 내가 돌봐야 해, 엄마를 속상하면 안 돼’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며 자랐던 모양이다. 내 인생의 목표는 오로지 엄마를 기쁘게 하는 일이 되었고 ‘엄마가 나를 통해 웃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 속에 모든 삶의 방향을 잡고 결정을 내렸다. 엄마가 2년 전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의 모든 삶은 엄마를 돌보는 일이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나의 고유한 선(線)을 찾지 못했다.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게 위해 나는 지극히 일반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살아온 셈이다. 나는 엄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나의 감정들은 안정된 상황에서 해소되지 못했고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거나 지지받지 못한 채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가끔 부모님의 노여움을 사는 형제들을 보며 마음을 졸였고 ‘저러면 안 되는데’하면서 더욱더 기쁨조 역할을 하기 위해 애썼다. 늘 가족들, 특히 엄마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를 하며 살아왔다. 결혼을 한 후에도, 아이를 낳고, 대학원을 다니는 내내 엄마와 가족들은 나에게 우선순위였다. 상담심리를 공부하고 오랫동안 내면의 탐색과정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내가 그동안 가족들과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가족들과 특히 엄마에게 쏟아부었던 나의 정성과 시간들이 나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얼마나 미안한 일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아하 경험’을 하게 된 후 스스로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조금씩 엄마와 거리감을 두기 시작했는데 병든 엄마는 못내 서운해하셨다. 그러나 나의 삶을 지나치게 희생하면서까지 엄마와 융합된 삶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안 이상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를 책임질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내가 그토록 매달리던 엄마도 아니고 내가 지켜내고 싶었던 가족도 아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뿐이다.


건강한 선(線)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 ‘내가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상처받을까 봐 말을 못 하겠어요’라고 말한다. 즉, 자신이 생각한 바를 상대방에게 표현하면 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봐 자신의 생각과 결정을 무시하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자신의 필요보다 타인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이 괜찮은 사람임을 증명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대한 책임감을 과도하게 느끼거나 도움을 줘야 마음이 편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과 상황은 뒷전으로 내어 놓는다. 물론 인간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기본적으로 확보하고자 하지만 선(線)을 지키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는 지난 과거에 엄마에 대한 책임감을 지나치게 갖고 있었다. 다른 형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일을 해야 해’라는 마음과 ‘자식이라면 이러는 게 당연해’라는 사고방식을 옳다고 확신하며 살았다. 내가 적절한 경계선을 확보한 이후 우리 가족의 역동은 변했다. 내가 해왔던 일을 놓자 다른 형제가 조금씩 하기 시작했고 분담되기 시작하였다. 형제들을 향한 서운함은 내가 자초한 일이었던 것이다. 내가 모든 걸 다 도맡아 해야 한다는 그런 과도한 충성심은 조심해야 한다. 내가 그러한 일을 도맡지 않아도 충분히 나는 괜찮은 자녀였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적절한 선(線)의 회복은 나와 가족들의 회복을 가져왔고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편안함이 선물로 왔다. 내가 엄마와 가족들에게 헌신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나쁜 일이 생길 것 만 같은 두려움은 허상이었다.


자신이 과거에 경험한 것으로 인해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망칠 수는 없다. 자시가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은 자신을 존중하는 일이다. 가끔 상담을 하다 보면 ‘무엇을 거절하고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호소하는 경우가 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아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천천히 자신의 욕구를 알아차려가는 과정을 견디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다.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무언가를 시도하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나 또한 그랬다. 늘 엄마를 전적으로 맡아왔던 일을 놓는다는 건 양심적, 도덕적으로 봤을 때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변화를 시도했을 때 나 자신을 돌봤다는 생각에 나의 행동이 옳았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생각이 든다면 ‘아니요’라고 표현해도 좋다. 그 표현으로 인해 상대방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에 대한 염려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여겨보자. 더 이상 주도권을 타인에게 주지 말고 당신이 소유하길 바란다. 왜냐면 바로 당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아무리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려 해도 완벽한 성공은 없다. 절대 당신은 타인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 삶의 주인은 당신이다.


선(線)을 지킨다는 것은 변화를 위한 선택권을 당신 자신이 가진다는 것이다. 타인의 삶을 사느라 당신의 삶을 내버려 두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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