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
- 나는 너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봐요
- 나는 눈치가 너무 빨라요
- 그 사람이 눈치가 없어서 정말 답답해요
- 내가 눈치가 없다고 사람들이 답답해해요
라는 말을 자주 한다. 오래전에 눈치에 대해 살펴보다가 도서관에서 집은 책 내용에서 눈치가 없었다면 인류는 망했을 것이라고 소개한 글이 기억난다(책 제목은 기억이 안 남). 눈치는 인류가 살아가기 위한 생존의 비밀병기로 써진 글이었다. 읽기 전의 나의 관점은 눈치라는 단어의 어감을 좋지 않은 느낌으로 갖고 있었으나 읽은 후에는 그 의미가 새롭게 재조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에는 누군가의 대화 내용에서 눈치가 나오면
- 아. 눈치가 이 사람에게 중요하구나
- 눈치가 이렇게도 발달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 사람에게 눈치는 어떤 적응적 기능을 했던 걸까?
라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곤 한다. 한인 2세 작가 유니 홍이 쓴 <눈치의 힘 The Power of Nunchi >에서는 눈치를 통해 한국은 존재감을 드러냈고 쿨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에 대한 영국 데일리 메일의 반응은 '눈치'를 한국인들에게만 있고 한국인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일과 사랑을 성공하게 만드는 중요한 능력, 미묘한 기술, 초능력이라고까지 호평하였다.
눈치를 영어로 대체하면 sense, wit 쯤으로 볼 수 있다. 센스나 위트는 사회생활을 할 때 이해, 분석능력, 감각, 재치 등의 의미이다. '눈치를 재다' 눈치가 있다'는 건 일의 정황이나 타인의 마음을 짐작하여 알아내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눈치를 주다'와 '눈치를 보다'에서의 의미는 어떤 한 개인의 사적인 의도가 드러나는 힘으로 보인다. 이렇듯 눈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는 역동 속에 그 힘을 과시하고 있다.
다른 입장에서 바라보는 눈치는 어떨까? 다들 한 번쯤은 '눈치 없는 행동'으로 인해 불편감을 겪었거나 불편감을 누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때문에 눈치가 없는 사람과 일하기 힘들고 눈치가 없는 사람과 대화하기 힘들다고 한다. 눈치 보느라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타인을 더 신경 쓰는 사람들에 속한다.
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반적 행동들이 일상생활에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하는 행동으로 본다. 아무도 만날 사람이 없는 날과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 날의 자신이 하는 행동을 보면 금세 답은 나온다. 씻고, 단장을 하는 것부터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의 로망인 '건물주'가 되기 위함도 어쩌면 돈 자체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당당해지기 위함이 근원적 이유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글쓰기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하자. 아무도 그의 책을 읽지 않고 팔리지 않는다면 과연 저자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순수하게 만족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의 인정 속에 재능도 빛이 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눈치는 왜 사람들에게 필요할까? 인간은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리를 지어 살아야 생존이 가능했으며 힘도 강하지 않아서 혼자 살기에는 부적합한 동물이다. 그래서 관계 속에 머물 때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살아있음 말이다. 인간은 살기 위한 목적으로 타인의 인정을 원한다. 결국 인간이 관계 속에 살아야 하는 숙명을 타고났기에 눈치를 보게 되는 듯하다. 타인에 대한 지나친 의식은 종종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피곤이 누적되면 바닥으로 확 꺼지고 싶은 충동이 인다. 관계 단절을 통해 에너지를 충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주기적으로 몇 달에 한 번씩 연락을 끄고 잠정 하다가 다시 나타나서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진짜 이기적이다. 자기 좋을 때만 연락하고 필요할 땐 연락도 안 받고'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들 나름대로 살기 위한 전략이니 눈치 주지 말자.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Jean Paul Sartre)는 '타인은 지옥이다(Hell is other people)'라는 말을 했다.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관계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에 각자의 실존에 스크레치를 낼 수밖에 없다. 인간은 타인에게서 절대 벗어나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론 적인 입장에서 보면 타인은 지옥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너무 가까이 가면 서로의 가시에 찔려서 아프고 너무 멀어지면 고독해서 힘들다. 오래전에 초등학생 중심으로 '왕따놀이'가 유행한 적이 있다.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된 지금, 과거를 회상하며 심한 외상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놀이라 하더라도 사람에게 있어서 '소외'는 상처가 된다.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통해 관계라는 게 언제나 지옥처럼 해석하는 것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다르다고 한다. 1965년 그의 강연에서 내가 나를 제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나를 판단한다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사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 타인의 평가나 판단에 지나치게 의존한 이유'라고 한다.
실존적인 입장에서 타인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지옥의 경험을 전혀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이지 싶다. 사람은 타인이 있는 한 절대 타인으로부터의 평가를 피할 수 없고 그걸 의식하는 개인은 온전한 주체적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를 위한 존재감을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한다.
타인과의 관계 경험이 불편하고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죽은 듯이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존재이므로 선택할 수 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푯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주는 시선'에 종속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그 누구도 자신이나 타인을 100% 눈치 있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눈치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에게 울리는 울림의 진동이 다르겠지만 부드럽고 따사로운 울림이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