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인정(認定)의 욕구가 있다. 내가 소중히 여기고 대상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구이며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깊은 욕구가 '인정에 대한 욕구'라고 하였다.
최근 새로 사귄 남자 친구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있는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다. 남자 친구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봐 주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 묻자 '내가 회사일로 힘들어하면 좀 위로의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을 한다. 어떤 위로의 말을 해주기를 바라는지 묻자 '잘하고 있어'라는 말 한마디 해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 말이 그녀에게 중요한 이유를 묻자 그런 말을 들으면 힘을 얻을 수 있고 내가 잘하고 있다는 인정받는 느낌이 든다고 하였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일에 있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남자 친구가 그런 말을 해주지 않자 눈치 없다고 서운해하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아주 기분 좋은 일이다. 내 삶을 의미 있게 살고 있음을 확인받는 일이다. 그러나 타인의 인정이 멈췄을 때 인정으로부터 오는 영양분이 끊긴 것처럼 삶 자체가 휘청이게 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고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 증가하면 자존감은 떨어지고 매사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인정이라는 달콤한 느낌에 심취하게 되면 끊임없이 그 느낌을 얻고자 자신의 중요한 것들을 쏟아붓는다. 인정의 짜릿함은 한순간이기 때문에 또다시 그 경험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인정 없이는 살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타인의 인정에 의해 자신의 가치가 오르내리는 경우 불안정한 삶을 살수 밖에 없다. 그 이유가 되는 첫 번째는 타인의 인정의 기준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정 욕구 자체는 만족감이란 것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인정 욕구는 더 큰 인정 욕구를 부른다. 인정을 받아도 효과가 오래가지도 않아서 더 큰 인정 욕구를 앞세우게 된다. 불편감이 계속되지만 인정에 대한 목마름은 더욱 강렬하게 일어난다.
30대 초반의 회사원 B 씨는 회사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다. 그녀는 하고 싶은 연애, 취미생활도 미루고 오로지 회사일에 매달리며 열심히 살아왔다.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하기 싫은 업무지시를 어긴 적도 없다. 상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척척 해냈기 때문에 회사 사람들은 그녀의 업무능력에 있어서는 인정하는 분위기다. 이러한 인정을 원했던 그녀이지만 왠지 기쁘지만은 않은 눈치다. 혼자 있을 때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뻥 뚫린 듯 공허하기도 하고, 축 쳐지는 우울감에 젖어들 때도 많다. 그녀가 얻은 인정은 그녀의 진심과 맞바꾼 대가이다.
인정 욕구가 필요 이상으로 절실한 사람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회사원 B 씨의 경우 집안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딸이었다. 아들을 좋아하는 집안 분위기는 그녀를 열등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들었고 아들인 오빠보다 뭔가를 더 열심히 해야 그나마 사랑받고 관심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고 공부든 일이든 열심히 해야 했다. 그녀의 인정 욕구는 가정 내 애정결핍에서 비롯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능력 사람이 인정받는다. 조금이라도 더 인정받기 위해 더 많은 스펙, 자격증을 취득에 여념이 없다.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외적으로 드러난 자격기준에 의해서 평가받기 때문에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라도 불사할 각오가 되어야 얻어낼 수 있다. 사회적 분위기가 인정에 대한 욕구를 과하게 상승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때 '관종'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에게 이목을 끌고 싶은 마음에 SNS,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에 게시물을 올려 무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비하하는 용어이다. 이런 사람의 경우 대부분 친한 친구가 많이 없고, 외롭고 현실적인 적응 상태가 좋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반응에 집착하는 시대적 분위기도 관종을 만드는데 한몫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셀카를 찍어서 올리거나, 자신의 감정상태를 SNS 게시물로 올리거나, 자신이 먹고, 여행하는 곳, 소비하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올려서 관심받기를 원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온라인 상에서의 관심은 빨리 뜨거워지고 빨리 차가워지는 법이다. 타인의 반응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태도는 오히려 소통 단절의 지름길이며 고독감만 증폭시킬 뿐이다. 처음에는 자신에 대한 작은 반응이 재미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더 하다 보면 점점 더 많은 반응을 기대하게 되고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인정 욕구가 강한 사람들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원인은 다양하다. 그러나 원인이 있다고 해서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감과 선택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할 수는 있겠다. 그렇다면 가정에서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 사회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 욕구 때문에 힘들어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채우고자 발버둥 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의연하게 그 욕구를 잘 조절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수많은 사람과 다양한 일을 경험한다.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상황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순간, 누군가의 따뜻한 돌봄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의 상처는 빨리 아물게 된다. 그렇게 아문 상처로 인해 더 단단해지고 면역력은 강화된다. 이러한 면역력은 앞으로 닥칠 위기상황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버팀목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버팀목이 많아질수록 그 사람은 더 건강해지고 위기상황에 있어서 극복하는 힘이 있으며 자신의 감정을 합리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
버팀목이 변변치 않아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보아야 한다. 내가 나의 소중한 사람으로부터 무시당하진 않았는지, 누군가 나를 소유물처럼 여기고 나를 함부로 대하진 않았는지, 내가 '아프다' '힘들다'할 때 내 목소리에 귀 기울여 준 사람이 있었는지 생각해보자. 버팀목을 얻을 수 있으려면 사람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존중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따뜻한 돌봄으로 인해 버팀목은 하나, 둘 만들어진다.
이러한 버팀목은 내가 타인에게, 타인이 나에게 되어줄 수 있다. 더 바람직한 방법은 내가 나에게 되어주는 방법이다. 내가 나에게 버팀목이 되어준다면 언제 어디서나 나를 지켜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갈구하며 헤매고 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외부로부터의 인정이 아니어도 충분히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타인이 필요하다. 타인이 그 욕구를 채워주어야만이 가능하다. 내가 통제권을 쥐고 있지 않고 타인에게 통제권을 넘겨주게 되면 진정한 자기로서의 삶은 살 수 없다. 인정 욕구에서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외부세계가 원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자신이 인정받고 싶어서 노력한들 상대방이 인정을 거절하면 자신이 해왔던 노력은 허사가 될 것이다. 이런 승산 없는 게임을 더 할 이유가 없다. 자신에게 스스로 버팀목이 되어준다면 매번 이기는 게임을 할 수 있다.
내게만 있는 소중한 것들, 나만이 가진 강점들에 관심을 갖고 자가 돌봄을 시작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