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해내야만 가치 있는 사람일까?
수행 불안증(performance anxiety)
지금보다는 더 나아져야 한다는 생각이 지나친 사람은 만족감을 모른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고 인정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 스스로 불만족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옆에서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라고 말을 해도 그 말은 전달되지 않고 다시 튕겨져 나온다. '당신이 나를 잘 몰라서 그래요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에요'라며 자신의 가치를 한없이 평가절하한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퇴근 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자격증 공부를 하며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열심히 사는 수영 씨는 무척이나 목표지향적인 사람이다.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가면 무언가가 차곡차곡 쌓여야만 만족스럽다고 한다. 물론 덕분에 과거보다는 발전을 했고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빠르게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성취물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매 해 연말이 되면 그녀는 반복적인 우울감에 빠지곤 했다. '연말이 되면 제가 일 년 동안 해냈던 일들이 별 볼 일 없어 보여요.'라며 공허감에 휩싸이곤 했다.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몸과 마음이 무척이나 힘겨워 보였던 그녀는 수행 불안증(performance anxiety)에 시달렸다. 열심히 달리며 아낌없이 열정을 다해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는 '너는 더 열심히 해야만 해'라는 목소리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쟁하듯이 누가 더 즐겁게 사는지, 누가 더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사는지, 누가 더 스펙을 잘 쌓아서 잘 나가는지에 대한 관심이 극대화되고 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온라인 미디어의 세계 덕분이기도 하지만, 원인을 탓하기 전에 자신에 대한 불만족이 가장 큰 이유가 된다. 뭔가 잘 못 사는 것 같아서 걱정되고, 남들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스트레스는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지금보다는 발전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더 멋있어지고,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고, 더 뛰어난 외모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 속에는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해냈을 때만 가치 있는 존재라는 비합리적 사고가 있다.
영국의 정신과 의사인 아이작 막스(Issac Marks)는 수행 불안증이 '다른 사람 앞에서 어떤 특정 행위를 할 때 느끼는 공포감'이라고 설명하였다. 일종의 사회불안 중에 하나이기도 한데 다른 사람 앞에서 뭔가 해내야 하는 상황을 지나치게 '위기 상황'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평가가 혹시나 부정적이라면 자신의 실질적인 생존까지 위협이 된다는 무의식적인 인식에서 비롯된다.
대중들의 인기를 먹고사는 연예인이나 가수, 배우들도 수행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극복에 어려움이 생길 경우 공황장애, 우울증, 대인기피증 등으로 확산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는 일상생활을 지속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에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 약을 복용함과 동시에 심리치료를 병행하면서 회복되기도 한다. 그러나 심하지는 않더라도 소소하게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는 경우도 흔하다. 예를 들면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야 할 때, 필요한 것을 타인에게 요구해야 할 때, 부탁을 거절해야 할 때 등의 상황에 놓이게 되면 필요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민감한 정도에서 시작하지만 이를 간과하는 경우 '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생각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고 경직되고 만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말이 튀어나온다던가, '싫어'라고 말해야 하는데 '알았어'라고 대답이 나온다던가, 자신의 생각과 의도와는 다른 말과 행동 때문에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들어가 보면 '나는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지면 안 돼'라는 왜곡된 신념이 내재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지나침은 때로 학교생활과 사회생활 전반에 어려움을 준다.
항상 상대방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꽉 찬 사람은 타인과의 친밀하고 긴밀한 관계를 겁낸다. '나의 좋은 면만 보고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신의 진실된 모습이 실망감을 줄까 봐 불안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명랑한 사람이 되어주어야 하고, 멋져보여야 하고, 매력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강박적인 사고가 그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과 있을 때 늘 애쓰며 산다. 관계를 즐기지 못하고, 노력하고, 힘을 주어 관계를 맺기 때문에 대인관계도 일처럼 피곤할 수밖에 없다. 피곤하면 당연히 쉬고 싶고 혼자 있는 시간에는 한없이 심신이 가라앉게 된다.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관계는 에너지를 갉아먹기 때문에 소진될 수밖에 없다.
최근에 부쩍 MBTI에 대한 검사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약식 검사지보다 더 정밀하게 제대로 하고 싶다는 의뢰가 들어온다. 이럴 때 나는 MBTI 검사뿐만 아니라 다른 검사를 1-2개 정도 더 추가하여 검사받기를 추천한 다음 검사 해석을 해준다. 한 가지 검사만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으며 오히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편향된 고정관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MBTI 검사를 제대로 해보고 싶은 이유를 물어보면 대부분 '내가 생각하는 내가 맞는지 궁금해서'라고 답한다. 이런 경우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를 내가 모르면 누가 알까' '검사를 통해 자신을 알면 과연 안심이 되는 걸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자신을 더 잘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자칫 검사 결과에 치중하게 되어서 자신에 대한 이해가 오히려 방해가 될까 봐 염려가 된다는 말이니 오해 없기 바란다.
최근에 MBTI 검사를 받아보기를 원했던 대학원생 지은 씨의 경우 외향적 성격의 점수가 높게 나왔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제가 원래 내성적인 면이 있는데 일부러 노력해서 외향적으로 좀 바뀐 것 같아요'라고 말을 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자 다른 사람들이 내성적인 사람보다 외향적인 사람을 더 좋아하더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성격으로 바뀌기 위해 노력했고 다행히 성공해서 안심이 된다는 눈치였다.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극복하려 했던 부분을 보니 기특했다. 그러나 행여나 그녀가 자신의 내향적인 기질을 '사랑받지 못하는 성격, 사회적으로 불리한 성격'으로 오해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해석상담을 마칠 즈음에 나는 '외향적으로 바꾸려고 너무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말고 지금 자신의 성격을 존중해 주세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상담이 끝나면 어김없이 이렇게 묻는 여성이 있었다. '선생님, 제 생각이 이상한가요?' '선생님, 제 생각이 다른 사람하고 같아서 다행이에요' '선생님, 제 생각이 다른 사람하고 다를까 봐 겁났어요'라고 말이다. 다른 사람과 다르면 뭔가 잘못된 사람이 된 양 불안해하였다. 다른 사람과 달라도 되는 세상이고, 다른 사람과 달라야 마땅한 삶인데도 말이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완벽함 때문만은 아니다. 완벽함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은 오히려 빈틈없이 보여서 답답하게 여겨질 수 있다. 업무적인 관계로서는 유지가 되겠지만 따뜻한 관계로 지속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때로는 허당인 모습이 좋아 보이기도 하고 허점이 있기 때문에 '나와 같구나'라는 안심이 들어서 끌리기도 한다. 너무 완벽하면 처음에는 관심이 가지만 이내 질리게 될 수도 있다. 완벽한 타인이 없듯, 완벽한 나를 만들려고 너무 애쓰지 말자.
어딘가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이 인간을 이 세상에 보냈다면, 원래의 모습으로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별처럼 아름답게 빛나면서 살아갈 수 있게끔 만들어 세상에 내보내지 않았을까. 빨리 걷는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느리게 걷는 사람은 느린 걸음으로 살아도 되는 게 삶이 아닐까. 물에서 사는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칠 것이고, 산에서 사는 다람쥐는 나무 타기를 잘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만이 '물고기 너는 왜 다람쥐처럼 나무를 못 타니' '다람쥐 너는 왜 물고기처럼 헤엄을 못 치니'라며 핀잔을 주는 거 아닐까.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