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는 참아야지’가 주는 원치 않는 보상

타인의 반응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어요

by 한꽂쌤

어릴 적 기억을 회상해 보면 나는 거의 말이 없는 아이였다. ‘조용하다’ ‘침착하다’ ‘내성적이다’라는 말은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붙여주는 단골 맨트였기 때문이다. 내가 말없이 무언가를 묵묵히 해낼 때 사람들은 나에게 칭찬을 많이 해주었다. 기질적인 성향과 더불어 칭찬이 주는 묘한 달콤함이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마음도 표현하지 않는 조용한 아이를 만들어 냈던 것일까?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보면 나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감정에 무딘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 그 누구보다도 궁금한 것들을 묻고 싶었고 느끼고 있던 것들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상담에 오는 사람들은 중 다수가 나와 비슷한 경험을 쏟아놓는다.


‘이 정도는 참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자식이라면 부모의 말에 수긍해야 하고, 부모라면 자녀에게 서운함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아야 하며, 사랑하는 사이라면 상대방을 향한 불편한 마음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믿는다. 어설프게 표현했다가는 관계가 망가지고 갈등이 생길 것이 뻔하기 때문에 차라리 그냥 하려는 마음을 꿀꺽 삼키는 편이 낫다는 논리다.


대학생 커플이 있었다. 공부도 같이 하고 밥도 같이 먹고 모든 대학생활에는 서로가 있어서 행복했다. 몇 년이 지나 남자 친구는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이전처럼 여자 친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시험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는데 한가로이 여자 친구와 연애를 즐기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어 여자 친구가 서운해하는 모습을 보니 미안해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공부에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여자 친구는 자신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관계가 멀어졌다’라고 받아들였고 남자 친구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지 않는 여자 친구에게 서운했지만 여자 친구 입장에서는 그럴만하기 때문에 자신이 맞춰주는 게 맞다고 여겼다.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선택한 것과는 다른 숨은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나를 좀 이해해달라고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고, 공감받고 싶고, 도움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매번 어쩔 수 없다며 참기를 선택한다. 자신이 해야 하는 공부에 대한 압박은 심해지는데 연애에 쏟는 시간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마음은 결국 시험 결과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연애도 원만하게 이어가지 못하게 했다.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을 '상대방을 불편하게 한다'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표현은 그저 표현일 뿐인데도 말이다. 표현한다는 것이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사회분위기도 한몫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비단 사회적인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도 한계가 있다. 무조건 참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전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어쩔 수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생각에 체념하듯 받아들이는 것과 ‘나는 이랬으면 좋겠어’라는 자신의 의견을 전달 한 이후에 받아들여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표현을 해본 후에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표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과는 무게감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거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을뿐더러 익숙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훈련은 필요하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시도해보려 하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고, 그렇게 해도 관계가 나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자신감이 생기게 된다. 참는 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표현해도 괜찮구나라는 생각에 확신이 들게 되면, '관계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힘을 잃게 마련이다. 자기표현 방법을 적절히 사용하면 갈등이 생길법한 일도 원만히 해결되고 끊어질법한 관계도 연결되는 경험이 찾아온다.


참는데 익숙한 사람들의 특징은 타인의 반응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이다. 자신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상대방의 마음이 상할까 봐 그대로 말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듣기 좋을만한 말을 골라 말하기에 바쁘다. 그런 말을 계속하다 보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게 되거나 그 사람과 마주하는 게 버거워지게 된다. 결국 관계의 단절로 이어지게 된다.


내 마음을 표현하려고 시도하려는 동시에 드는 생각들이 있다.

괜히 이 말을 했다가 저 사람이 기분 나빠하면 어떡하지?

이 말을 하면 저 사람이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내 속마음을 표현하려다가 좋은 관계가 틀어지면 어떡하지?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을 때 상대방 또한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해주면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에 자신이 예측하지 못하는 부정적 반응이 나오면 서로 기분이 나쁘게 될 가능성을 크게 두기 때문에 자기표현을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 이면에는 상대방의 반응이 내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숨어있다. 누구나 사람들은 나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고 반응도 다를 수 있다. 화를 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기분이 나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가치관이 다르면 이견이 생길 수도 있고 갈등도 생길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이상하거나 틀린 게 아니라 당연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의견을 제시했을 때 상대방이 잘 받아줄 수도 있고 이견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이러한 선택지를 자연스럽게 놓아두고 누구나 내 생각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허용해주자.


저 사람은 나와 생각이 다를 수도 있어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야

나는 내 마음을 표현한 것 자체만으로도 괜찮아


자기표현을 할 때 망설이는 이유는 상대방의 반응을 예측하고 부정적 가설을 세우기 때문이다. 지레짐작해서 겁먹지 말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진솔하게 얘기해보는 용기를 내보자. 일단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본 다음 상대방과 조율해나가면 원활한 소통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자기표현의 기본은 상대방의 반응을 잠시 내려놓는 것이다.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자.


그 이후는 상대방의 반응을 보면서 조금씩 소통해 나가는 것이다. 상대방은 상대방의 스타일대로 반응할 것이므로 내가 그 반응까지 신경 쓰려하면 그 어떤 표현도 하지 못하게 된다. 나는 나의 마음 새를 표현하고 상대방은 상대방의 마음 새를 표현하도록 허락하는 자세야말로 소통의 출발선이 아닐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가 당신(나)을 실망시킬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