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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꽂쌤 Mar 03. 2023

소리일까 소음일까

감사일까 불만일까

최근 온라인 검색창에 '집 살 때 꿀팁'이라는 주제로 글이 게재되었다. 집을 살 때 뭔가 좋은 정보가 있는가 하여  내용을 읽어보니 층간소음에 관한 내용이었다. 아파트에 살다 보면 앞집, 윗집, 아랫집 등과의 층간소음으로 인해 괴로움을 호소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예년에 비해 코로나시기에 들어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4배 이상 급증했다고 한다. 소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시끄러워서 못살겠다'는 불만스런 목소리로 커져만가고 있다.



갈등이 심해지다 보니 층간소음에 대처하는 법, 복수하는 법 등에 대해 특급비법이라도 전수하는 양 기상천외한 방법이 선보인다. 층간소음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라며 전생을 비하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층간 소음 때문에 이생뿐 아니라 전생까지 운운하게 되는 상황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집을 잘못 지어서인지, 사람들이 예민해서인지, 국가에서 관리감독을 못해서인지, 이것도 아니면 법이 잘못된 건지 운운하며 불만만 쌓여간다. 


상담을 하다 보면 가끔 내담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에 대해 '단어 속 담겨진 의미'를 함께 살피는 시간을 갖는다. 육아가 힘들다고 호소하는 새내기 주부에게는 '육아는 당신에게 있어서 어떤 것인가',  좋은 부모가 되고 싶다고 오는 부모에게는 '좋은 부모란 대체 어떤 부모를 말하는가'에 대한 나눔의 시간이다. 혼자서 정의를 내리다 보면 자칫 그 의미가 왜곡되기 쉽다. 예를 들어 '긍정적이다'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좋게 바라보는 것

자신에게 이로운 것

내게 도움이 되는 것

나쁜 것들, 안 좋은 것들은 되도록 안 보거나 피하는 것


긍정적이라는 단어가 보편적으로 해석되는 예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진정한 긍정성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그 자체를 부인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태도이다. 제대로 된 긍정성을 의미하다 보면 자신이 얼마나 편견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가늠하게 된다. 


이쯤 되면 소리와 소음에 대한 차이를 생각해 볼 만하다. 소리는 내게 해를 주지 않지만 소음은 나에게 해를 준다는 의미가 된다. 왠지 거슬리고, 조용히 지낼 권리를 빼앗아간 나쁜 그 무엇이 된다. 소음은 없애버려야 마땅하고 사라져야 하기 때문에 이를 없애려고 싸움을 걸고,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과연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소리가 소음일까? 아이들이 뛰는 소리, 걷는 소리, 물 내리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 등이 모두 다 거슬리는 것일까? 아이가 어릴 때 혹여나 잠에서 깨어날까 봐 남편의 행동을 제한했었다. 아기가 자다가 깨어나면 그 이유가 남편 때문이고 그것 때문에 아이 컨디션이 나빠지고 아이 컨디션이 나빠지면 내가 아이를 돌보기가 벅차게 된다. 결국 내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남편을 나무랐다. 그러나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존재다.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적절한 소리와 방해가 되는 환경에 적응해야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층간소음으로 피해를 줄까 봐 저층으로만 이사를 다녔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무심하게도 아래, 위층 사람들은 시끄럽다고 항의를 했고 아이들은 나와 함께 그 장면에 함께 했다. 한 두번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아이들이 이상해졌다. 누군가 현관 벨을 누르면 쥐도새도 모르게 숨는 습관이 생겼다. 벨이 울리면 눈썹 휘날리게 침대 아래, 소파 뒤, 방 안으로 요술처럼 사라지곤 했다. 그들이 두려웠던 것이다. 뭔가 우리 집사람들이, 특히 자신들이 그들에게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혼나는 것이라 여기며 숨어버렸다. 지금은 그때 이야기를 하며 아이들과 웃을 수 있지만 그때는 많이 속상했다. 전생을 운운하진 않았지만 '애 낳아 키우는 게 죄인가?' '애들 발을 묶어두란 말인가' 등등 항변하고 싶은 말들이 마구 솟구쳤었다. 물론 타인에게 피해가 되지 않게 주의를 주고 교육을 시켜야한지만 어린아이들은 그 발달단계에 맞는 행동을 하게 마련이다. 그 건강한 행동을 못하게 하는데도 한계는 존재했다.


몇 달 동안 같은 길을 걸었던 아침 산책길에서 오늘은 처음으로 물소리를 들었다. 어이가 없었다. 산책길 아래로 자그마한 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그 개천 중간쯤에 배수로가 크게 나있어서 그곳에서 물이 쏟아져 합류하는 소리였다. 이전에는 왜 몰랐을까? 분명히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그때와 지금 전혀 달라진 건 없는데 달라진 게 있다면 나의 주의이다. 얼굴을 그쪽 방향으로 돌리니 더 크게 들렸다. 내가 그동안 산책을 다니면서도 다른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고 나의 주의가 달라지니 들리는 소리도 달라지게 된 것이다. 달라진 건 나뿐이다. 내가 주의를 기울이면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린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크게 들린다. 그동안 그 소리는 나의 산책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는데 내가 주의를 돌리는 순간 소리가 너무 커서 소음으로 들렸다. '저 배수로에서 물이 쏟아지지 않으면 더 조용히 산책할 수 있을텐데'라며 배수로를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참 이기적이네'라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내가 뭐라고 저 소리를 멈추게 할 수 있으며 무슨 권리로 배수로를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나는 내가 가는 이 자그마한 산책길이 있음에 만족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에 감사하면 될 일을. 


주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내 기분이 달라진다.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바라보면 감사가 되지만 거슬리는 것에 기울이면 불만이 된다. 


오늘 이 순간만이라도 감사하자. 어린아이가 건강하게 뛰고 걷는 것에 감사, 저출산 시대에 자녀를 낳아준 부부에게 감사, 그 아이가 커서 우리나라를 튼튼하게 책임져줄 것에 대해 미리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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