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지난번에 너 때문에 수치심 들었어'라고 표현할 때 구체적으로 무슨 감정이 들었다는 말인지 감이 안 올 때가 있다. 그만큼 수치심이라는 단어 안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있는 것 같다. 부끄러움, 죄책감, 당혹스러움, 불안, 거부와 멸시로 비롯된 정서 등 하나로 정의하기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결국 수치심은 다른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 자신을 폄하하거나 후회와 치욕스러움을 경험할 때 찾아온다. 나의 중요한 어떤 부분이 내가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노출되었을 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를 일컬어 '수치심의 문화'라고 표현하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수치심에 대한 이해가 더 빠를 수도 있겠다. 젊은 층들이 나누는 대화 중에 '쪽 팔린다.' '얼굴 팔렸다'라는 말을 하는데 아마도 이 말속에도 수치심이라는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특히나 다른 사람에게 체면을 세워야 뭔가 자신감이 생기고 사람도리를 한 것 같은 느낌을 갖는 문화이다. 남자화장실에서 중년이상의 남성이 소변을 볼 때 청소하러 들어온 아주머니가 남자에게 발 좀 치워달라고 요구를 하는 경우 남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산부인과에서 여성이 부인과 검진을 받을 때 남성의사 앞에서 자신의 신체 부위를 보여야 할 때 수치심을 느꼈다고 말한다.
수치심은 부끄럽고 창피해서 어딘가 숨고 싶은 자의식이다. 적절한 수치심은 행동하는 데 있어서 적응적 기능을 하지만 지나치면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위축된다. 수치심을 방어하기 위해 '뻔뻔함'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저 사람은 부끄럽지도 않나 봐. 왜 저렇게 뻔뻔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정말로 부끄럽지 않다기보다는 부끄럽기 때문에 차라리 뻔뻔함을 택한 것이다. 수치심을 방어하기 위한 다른 방법 중에는 다른 사람을 향해 조롱하거나 비웃는 것이다. 화를 내거나 모멸감을 주는 것도 해당한다. 거만하기도 하고 오만하기도 한 그들의 태도는 수치심의 반동형성이라고 볼 수 있다.
한참 유행했던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단어 안에도 수치심이 드러나 있다. 가스라이팅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교묘하게 조작해서 그 사람 스스로가 자신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을 지배할 수 있는 통제권을 갖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수치심에는 강한 자의식이 결집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감정이 자신에게 향하기도 하지만 타인에게 향할 수도 있다. 타인에게 향할 때 오히려 수치심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여 자신의 수치심을 감추는 사람들이 있다.
경수씨는 자신보다 더 잘난 여자친구에게 열등감이 있다. 그 열등감이 심해지자 못난 자신이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여자친구가 자신을 떠나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불안했다. 그는 결국 가스라이팅 함으로써 여자친구 스스로 자신이 형편없다고 느끼게 하였다. 경수씨가 다루지 못한 수치심이 여자친구에게 전가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자친구를 곁에 두고 조종하는 데 성공했다. 여자친구는, 경수씨보다 자신이 못났기 때문에 남자친구가 자신을 떠나버릴까 봐 불안해하며 매달렸다. 경수씨의 수치심이 여자친구에게 옮겨짐으로 해서 경수씨는 안정감을 찾았다.
수치심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해소해 보려고 노력한다. 나쁜 기억을 잊고 경험을 왜곡하거나 다른 사람을 가스라이팅 하며 덮어씌운다. 다른 사람을 폄하하면 자신은 수치심이 낮아지는데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험담을 즐겨하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의 흠을 집요하게 찾아냄으로써 자신의 자존감은 지켜내려는 심리다. 그러나 그렇게 지켜낸 자존감은 가짜다.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수치심에 민감하고 자신의 부족함이나 실수를 다른 사람이 알아차릴까 봐 전전긍긍하게 될 뿐이다.
수치심이 죄책감과 비슷한 부분은 후회스러운 감정 때문이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후회가 뼈저리게 찾아온다. 죄책감에 비해 수치심은 자기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죄책감은 수치심에 비해 어떤 행동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지만 수치심은 행동과 자아에 대한 구분이 모호하다. 어떤 환경이 수치심을 줄수도 있지만 자기가 정한 이상적인 기준에 못 미치게 되는 경우 수치심이 든다. 타인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자신만의 열등감과 비밀, 다른 사람보다 못나 보이는 외모나 지적능력 등에서도 수치심이 일어난다. 이쯤 되면 수치심은 실제로 일어난 경험을 통해서 느낄 수도 있지만 상황이나 환경에 대한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남들은 잘 나가는데 나만 왜 이모양일까'라며 자기 스스로를 혐오하는 사람들도 수치심에 휩싸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를 왜 '수치심을 권하는 사회'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보다 잘난 사람이 많고, 스펙을 쌓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도 항상 부족한 것 같은 느낌, 열심히 투잡, 쓰리잡을 뛰어도 해결되지 않는 궁핍한 삶 속에서 수치심은 배어있다. 수치심에 취약하게 되면 자기 스스로에 대해 불만이 생기고 사회 전반적인 법과 제도를 바라볼 때 화가 치밀어 오른다. 자기가 스스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성찰하려는 대신 '남 탓' '사회 탓' '세상 탓'을 하며 외부로 책임을 던진다. 실패할 때 찾아오는 수치심은 달갑지 않다. 그래서 자꾸 하지 않으려고 하고 시도하지 않으려 한다. 결정하지 않으려 하고 책임질 행동을 하기를 주저한다. 이러한 마음이 개인의 수치심으로 그친다면 작은 문제에 불과하지만 사회 전반적인 입장에서 수치심을 바라본다면 큰 덩어리의 주제가 된다.
뭔가를 한다는 것은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노력을 그만둔다면 실패를 맛보지 않아도 된다. 해도 되는 권리를 하지 않을 권리로 바꿔서 선택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로 포장한다면 그 대가 또한 각자 치러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성공을 꿈꾼다. 성취, 성장, 자기 계발, 도전, 발전 등 자신의 앞길에 걸림돌이 없기를 바란다. 이러한 간절함은 실패를 두려워하게 된다. '실패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해 민감하다. 정작 자신이 할 일에 신경을 써야 하지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수치심을 건드리고 만다.
후배는 열심히 공부한 자격증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고 한다. 시험접수까지 해놓고 정작 시험날에는 잠수를 탔던 것이다. 나중에 이유를 물어보니 '시험을 보고 나서 떨어지면 수치스럽지만 아예 시험을 보지 않으면 떨어진 건 아니라서 시험을 보지 않았다.'라고 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래도 시험은 한번 봤으면 좋지 않았을까'하며 후배의 선택에 아쉬움이 남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다시 생각해 보니 '수치심을 경험하기 싫어서 그랬구나'라는 생각에 안쓰러웠다.
그렇다면 수치심을 잘 처리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수치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시기질투하거나 화나는 감정 등이 요동친다. 왠지 모르게 자신 안에 이런 감정들이 자주 드러난다면 수치심을 다뤄야 하는 신호로 받아들이면 좋다. 수치심은 전염된다. 자신이 느낀 수치심을 다른 사람에게 떠안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수치심을 받아내고 있을 수 있기에 경계해야 한다.
수치심은 숨기려 할수록 문제가 된다. 알코올이나 음식중독 등 다양한 중독, 강박적 행동, 지나치게 자신을 비난하거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수치심을 해결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자기 스스로 '내가 이 정도도 못하나?' '이것밖에 안 되나?'라는 수치심이 사소한 것에 참을 수 없게 되고 별 것 아닌 것에 예민하게 된다. 지나친 민감성이 중독이나 강박행동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된다. 수치심이라는 핵심감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결연한 의지로도 해결되기 어렵다.
수치심은 내 마음 깊이 내밀한 곳에 숨겨둔 약한 부분을 건드릴 때 밀려드는 감정이다. 외모에 자신이 없어서, 가진 것이 없어서, 학벌이 안 좋아서 등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는 이야기를 피하게 된다. 수치심의 강도가 약할 때는 '아 부끄럽네'의 정도로 밀려오지만 심한 경우 상황 자체를 기피한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 드러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고 자신을 떠나갈 것이라는 두려움에 겁먹고 움츠러든다.
아무리 마음을 강하게 다져도 절제가 되지 않고 다시 반복되거나, 고치고 싶은 행동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수치심을 살펴볼 때이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자신이 혐오스러울 때, 인간관계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수치심을 살펴보자.
자신이 직면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무엇이 그렇게 견딜 수 없게 만드는지
왜 이 상황이, 그 사람이 거슬리는지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드러내야 한다. 이 또한 쉽지는 않다. 수치심에 접촉할수록 수치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더욱더 힘들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드러내지 않으면 수치심의 늪에서 빠져나오기는 힘들다. 용기를 내어 시도해 볼 만한 것부터 시도해 보자. 일자 샌드 작가가 추천한 몇 가지 방법을 안내하고자 한다.
첫째,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믿을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용기 내어 표현해 보자. 표현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다. 단, 상대방이 나의 이야기를 평가하지 않고 충분히 공감하고 들어주어야 한다. 믿을만한 대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상담자, 의사, 익명으로 소통이 가능한 사람 등 관계가 끝나도 두렵지 않은 사람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셋째,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에게 수치심에 관한 편지를 쓰는 것이다. 다만 실제로 부치지는 않는다.
존 브래드 쇼는 해로운 수치심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 하는 것'이라 하였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고, 뭐든 완벽해야 하고, 모든 걸 통제해야 하고, 의지만으로는 안될 일을 지나치게 하려 하는 행동 등 바람직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수치심으로 인한 행동이다. 수치심은 내면의 불만족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가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에 외부의 다른 대상을 통해 만족감을 얻으려 한다면 수치심으로 기인한 것은 아닌지 살펴보자.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그 일을 해낸 자신을 뿌듯하게 여기도록 하자.
수치심의 치유는 어떤 모습이든 그런 나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대로 존중해 주는 것이 전부다.
나의 모습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