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허무맹랑함에 대하여
가족끼리 시골집에 내려갈 때, 아빠는 늘 운전을 하며 조수석을 흘끔거리셨다. 어린 마음에 그게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자꾸만 쳐다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막연히 나도 언젠가 결혼을 하겠지, 내 남편도 운전할 때 나를 힐끗 쳐다볼까 생각하던 유년의 나는 어느새 스물다섯이 되었고, 결혼은 내 인생과 무관하고 막연한 일인 듯 보인다.
요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근거 없고, 허무맹랑한 것들. 희곡 수업에서는 매주 신춘문예 극, 어떤 때는 드라마 극본을 읽고 비평하는 과제를 해야 한다. 발제문을 작성하고, 발표할 때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이건 개연성이 없는데, 어떠한 지점에서 이런 감정이 발생할 수 있는 거지..라는 극에 대한 비평을 하거나 듣게 된다. 아주 타당한 비평이므로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가끔은 감정의 발생이 그렇게 정확한 계기와 시발점을 가지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랑은 호르몬의 작용일 뿐이라는 글을 볼 때면, 납득하기 싫어서 일부러 읽지 않고 지나칠 때도 있다. 그런 것들이 좋다. 예측 불가한 것들.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것들이, 이것들을 몽땅 모아 낭만이라는 단어로 쉽게 치환하고 내 멋대로 생각하는 것들이.
매일같이 지나치는 등굣길에는 위안부 소녀상이 있다. 비가 올 때도, 눈이 내릴 때도, 바람이 불 때도 그 아래에는 꽃다발이 끊이지 않는다. 어느 때는 목도리가. 그런 것들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관념적인 것들이, 아무리 해도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은 무력감 앞에도 어쩌면 그런 관념들이 우리를 계속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라고.
학교는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소속감을 주지 못한다. 영원히 계실 것만 같던 교수님들도 은퇴하고, 나는 학생이지만 어쩐지 한 걸음 정도 물러서 있는 듯하다. 예전만큼 배움이 기쁨이나 새로움을 주지는 않는다.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재능 앞, 야 너는 계속 이 길을 가야 하지 않겠어? 했을 때. 너는 적어도 진심이잖아 하고, 무심하고 시큰둥한 대답이 돌아왔을 때. 끌어안고 가기에는 너무 크지 않나, 내 그릇은 너무 작지 않나, 이 작은 곳에서도 그렇게 느끼는데 하며 생각할 때. 너는 무서워하면서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 만나본 적 없는 사람, 안미옥 시인의 친구의 말을 되뇌곤 한다.
쓸 것은 넘치는데 펜과 종이가 없다. 교수님이 주신 프린트를 그대로 적었더니 너무 많이 적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