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뜨거움에 대하여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
“방금 들었어? 홍콩 공항 지금 32도래, 날씨는 대체로 맑다는데 “
밤비행기는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마치 우주에 둥둥 떠있는 듯하다. 왜 여행지로 홍콩을 골랐더라 하는 고민은, 도착지가 가까워갈수록 갈피를 잃는다. 두근거림은, 여행의 의미 따위 없어도 될 것만 같고
매년 은밀하지만 분명히 달라지는 내 모습을 안다. 그래서 하루라도 젊을 때, 무작정 무리해서 훌쩍 떠나곤 한다. 여행을 사랑하는 나를 잃어버리는 게 너무 싫어서. 붙잡아도 더 이상 좋아지지 않을 때가 올 때까지.
도착한 8월의 홍콩은 습하고 더웠다. 낯선 언어들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완벽한 이방인이 된 것만 같았다. 그 외로움이 묘한 자유를 느끼게 했다. 그리고 여행하는 일주일 내내 행복했냐 묻는다면 주저 없이 그랬노라 답 할 정도로 행복했다.
아래는 내가 겪은 홍콩이다.
1. 홍콩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이 전혀 없다.
길거리에서 노래를 고래고래 불러도 관심이 없을 것 같다.(실제로 그랬다는 것은 아님. 작게 부름.) 이게 생각보다 자유를 느끼게 한다. S와 내가 아이러브홍콩 티셔츠를 짱구 신혼부부처럼 맞춰 입고 다녀도 눈길 한 번 주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불의의 사고로 인해 내가 래시가드 상의에 청치마를 입고 거리 한복판을 돌아다니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하얀 얼굴의 사람들만 쳐다보았지 현지인들은 놀라울 만큼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놀라울 지경이다.
2. 근데 생각보다 불친절하다.
남에게 잘 보여야지, 좋은 사람으로 보여야지에 대한 관심이 없어 보인다. 처음에야 무례하다고 여겼지만, 나중에는 신경도 안 쓰인다. 무심하고 건조하게 thank you를 연발했다.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나의 마지막 자존심.
3. 생각보다 한국인이 없다.
물론 비성수기여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여행의 무드. 낯선 이국에서 이방인임을 여실히 느끼는 순간이 매우 많았다. 언어라는 게 참 그런 게.. 외관으로는 크게 구분되지 않음에도, 들리는 말소리가 다르니까 동떨어져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냥 별 허튼소리를 다했다. 칸예 웨스트가 한국 소고기집에서 80만 원인가 썼다는 기사를 봤는데, 솔직히 한국을 돌아다니는 칸예가 된 기분이었달까. 내가 사는 지역은 특히나 좁아서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관계에 많이 얽혀있다. 아무튼 이러한 자유도 한몫함.
4. 홍콩의 거리는 예쁘다.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제된 거리가 아니라 묘하게 지저분한데 되게 어울리는 느낌. 거리가 더럽고 쓰레기가 굴러다닌다는 뜻이 아니라 날 것, 그러니까 구건물 신건물이 한 데 섞여 자아내는 분위기가 독특하다. 그런 지저분한 아름다움이 있다. 홍콩의 땅값은 매우 비싸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건물이 높다. 거리의 야자수가 보기 좋다. 더위와 참 잘 어울린다. 과일도 되게 달다. 파인애플을 맨날 사 먹고 싶었을 정도로.
5. 청킹맨션은 무지 무섭다.
허리춤에 곤봉을 찬 경찰들이 두세 명 서 있었다. 입구에는 인도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그들은 담배를 입에 물고, 가끔은 이상하리만큼 끈덕지게 쳐다보았다. 발 앞으로 재빠르게 무언가 지나가는 것을 흘깃 보고 고개를 들자, 태어나서 처음 본 풍경과 냄새가 있었다. 사람 냄새와 향신료 냄새. 뜨겁고 축축한 공기와 묘한 냄새, 낯선 사람들, 낯선 말들. 어둑한 내부에 간신히 빛을 내는 조명들. 내가 사라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8월 홍콩은 무지무지 덥다. 똑 단발에 나시가 참 어울리는 곳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