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The whale 비평
영화에서 제목이 가지는 힘은 얼마나 될까?
더 웨일이란 영화는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제목이 다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름 돋게 잘 지은 은유적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초고도비만 뚱보를 부르는 슬랭 웨일,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자 포유류 웨일, 그래서 대부분 물(바다)에 살지만 숨을 쉬기 위해 물밖으로 나와 숨을 쉬어야 하는 아가미가 없는 어류의 모습을 한 포유류 고래(웨일)는 주인공 찰리의 처지와 비슷하다. 보통 사람으로 살아갔지만 동성을 사랑해서 공기가 있는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잠깐 숨만 쉬었던 찰리.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자주 인용되어 등장하는 소설 모비딕의 웨일. 노벨제목상이 있다면 ‘더 웨일’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하지만 영화와 찰떡같은 제목 고래는 생각보다 숨을 시원하게 뿜어내지 못한다.
온라인으로 에세이 작문 강의를 하는 대학 교수 찰리는 과거 제자 앨런을 만나 부인과 딸을 버리고 세상에서 금기시하는 동성 제자와의 사랑을 선택한다. 하지만 가정까지 버린 결단을 내린 찰리와 달리 마음의 굳은살이 단단하게 여울지 못한 어린 앨런은 정확히 무슨 이유인 줄 모르겠지만 음식을 거부하다 스스로 세상과 찰리에게 작별과 이별을 고한다. 사랑하는 연인의 영원한 부재 앞에 찰리는 너무나도 허망한 허기진 마음을 폭식이라는 자기 파괴적 행동으로 채우다 초고도비만이 되어 일주일 시한부 인생을 온라인으로 확인한다.
찰리는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10년 동안 보지 못한 딸 엘리가 보고 싶고 죽기 전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엘리가 등장하여 칙칙하고 어둡고 냄새나는 죽어가는 찰리의 집에 와서 10년 만에 아빠에게 첫마디를 던진다.
“나도 이렇게 (아빠처럼) 뚱뚱해지는 거야?”
불길한 예감이 드는 대사였다.
대사 안에는 ‘나는 유전적으로 아빠의 딸이다’라는 암시와 함께 딸과의 화해가 구원으로 가는 분명한 신호로 보이며 엘리가 첫 등장 마지막 장면에 찰리에게 “나한테 걸어와봐.” 할 때도 스스로 도움 없이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나겠구나 하는 예측이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500파운드의 초고도비만의 엄마가 스스로 2층 계단을 올라가서 2층 침대에 누워 죽는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딸과 티격태격하다가 아빠와 딸이 서로를 이해하고 울고 슬프고 가족 뭐 그런 식으로 가는 결말은 아니겠지 하는 나의 기대와 함께 영화 ‘아이엠 선생님의 뚱보 버전인가?’하는 생각까지 스치게 했다.
명작 ‘블랙스완’의 감독 대런 애러노프스키가 식상한 할리우드 신파(가족주의)로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조마조마하며 봤지만 영화는 예상을 크게 빗나가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찰리가 딸에게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에 슬픔, 감동, 울림의 감정은 없었다.
키치 하지 않은 영화적 욕구에 감정이 방해받는 일이 많은 천성인 듯하다.
감독은 좁은 연극적 그릇 안에 너무 많은 재료를 넣은 듯하다.
동성애, 소수자, 구원, 입양, 종교, 거식증, 폭식증, 중독, 이단, 구원, 소설, 모비딕, 글쓰기, 자기 생각, 논지의 진실성, 가족, 이혼, 증여, 이방인, 선택, 존엄사, 실존주의 등등..
고립된 작은 무대 안에 넘쳐버린 재료는 어울리지 못하고 흘러넘친다.
구원을 이야기하려면 이창동 영화 ‘밀양’같이 하고 가족을 이야기하려면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처럼 했으면 한다.
나는 더 웨일이라는 영화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의 찰리가 줄곧 이야기했던 자기 생각, 논지의 진실성에 기반하여 내 생각을 적어 보았다.
그래서 이 글은 더 웨일에 대한 상찬이다.
George 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