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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비평

사랑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1

by 조지조


자존감이 없는 여성으로서 세상의 부조리에 직면했을 때의 한순간의 잘못된 대처가 인생을 어떻게 꼬이게 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불편하지만 유쾌한 문제적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영화적 시선으로 보면 사회적 낙인(범죄 또는 질병)이 개인의 인생의 서사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 강도이고, 다수의 시선에 인간은 압도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사회적 낙인은 세속적 삶의 족쇄이며 형벌이다.


낙인의 주변인들이 떠들어대는 재잘거림은 가벼운 사람의 입과 SNS를 타고 풍선처럼 커져버린다. 언제 터져도 아무렇지 않은 풍선이 돼버린 낙인자는 자기혐오에 빠지며 자신을 잃어버리고 이치키모리가 되어 결국 심하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위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마츠코이다.


영화를 보고 영화 속으로 들어가 마츠코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고,


따뜻하게 한번 안아주고 싶었다.


“‘마츠코.. 그 사람 아니야.. 마츠코.. 넌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야.. 왜 그런 사람을 선택해?”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그녀의 선택을 안타까워하며 나의 과거의 잘못된 선택도 후회하며 과거의 나 같다는 생각도 어쩌면 해본다.



주인공 마츠코가 끝없이 사랑을 갈구한 심리적 원천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주인공의 타인의 시선에 대한 욕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오롯한 시선에 대한 내면화의 부재. 즉, 타자와 나의 시선의 인정의 균형이 무너져 내면의 자존감의 시소가 무너져 버렸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인정욕의 존재다. 보통 존재가치를 증명이 타인의 시선에 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첫 단추가 잘 못 끼워졌다. 마츠코는 스스로를 더 사랑했어야 한다. 존재가치의 증명을 내가 나를 증명하는 쪽으로 갔어야 한다.


아빠에게 익살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 내 안으로 나를 위해 웃었어야 했다.


그래서 마츠코의 가짜 익살은 ‘인간실격’의 요조의 아버지에 대한 익살과 닮아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차분이 들여다보는 일이다.


또한 나 본인에 대해 질문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좋은 질문을 던지고 대화해야 하며 나를 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알게 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사용하여 나를 증명하여 내 가치와 자존감을 세워야 한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정신과 육체의 나아짐. 즉 공익에 도움이 되면 금상첨화이다.



모든 것은 사유부터 시작이다.


나는 소설과 인문학 특히 고전을 읽을 때 엄청난 생각과 철학적 사유들이 몰려오며 그것에 재미를 느끼며 그것에 대해 글로 정리하고 싶은 욕구도 왕성해진다.


사유가 깊어지면 말과 행동도 단단해지며, 글로 쓰는 것이 나의 생각을 가장 잘 논리적으로 정돈해 주며, 내 글을 다시 읽고 되레며, 그 글이 자동적으로 나의 논리적이고 단단한 언어가 된다.



자기 언어와 논리가 단단해진 그런 사람에겐


다른 사람에게 볼 수 없는 아우라와 강렬한 눈빛 그리고 여유가 느껴진다.



생각하는 사람의 사유에는 개똥에서도 의미와 가치를 또한 재미를 보는 시야와 깊이가 생긴다.


그런 사람을 곁에 두거나 인생을 함께 한다면 뭘 해도 즐겁고 재밌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설파한


‘무언가를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가 존재한다는 걸 안다.’와


데카르트형의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설득이 되는 이유이다.



결국은 나에 대한 사람에 대한 세상에 대한


단단한 생각이다.



어쩌면 모든 것의 만병통치약은


깊이 있는 생각을 하게 도와주고 현명한 선택을 하게 만드는 그런 좋은 지혜로운 사람과 책을 곁에 두는 것이 아닐까?



현명하고 좋은 사람들과 같이 읽고 생각을 나누는 것이 혐오스럽지 않은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백신이다.



George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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