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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처음 파인다이닝을 맛보게 해 준 일본인 아줌마

햇살같이 따뜻했던 나의 아줌마

by 서정

나의 아줌마. ㅋ


이제 슬슬 바람이 불고 추워지는 날씨가 다가오게 되면 꼭 보아야 하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아이유와 이선균이 나오는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이다. 넷플릭스에도 있으니 안 보신 분들은 천운이라 생각하시고 꼭 겨울맞이로 보시길 강추드린다.


그런 아저씨가 나에게도 있었다. 나의 일본 유학 중 고되고 외로웠던 대학교 4학년, 연구실 생활을 함께했던 그 아줌마 '오다상 (오다 씨)'에 대해 적어본다. 오다상이랑 헤어지는 졸업식에서는 서로의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던 각별한 사이를 소개한다.


처음 그녀를 만난 건 내가 속한 연구실의 같은 연구에 참여하는 실험 보조원이었다. 조그만 키에 가지런한 단발머리, 츠루츠루(물광이 도는)한 화장에 발그레 블러셔로 색칠된 볼, 얇은 갈매기 모양의 눈이 나에게는 참 캐릭터처럼 느껴졌다. 작은 키에 조끼와 니트를 좋아했던 사랑스러운 오다상은 비록 대학생인 나보다 띄동갑을 넘어설 정도의 연륜을 뽐냈지만 마음만큼은 젊은 소녀 그 자체였다.


역시, 누군가 친해지기 위해서는 공공의 적이 필요하다. (한일의 공공의 적은? 이란 재밌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 우리 실험을 담당하는 교수님은 항상 무섭고 거칠고 뾰족했다. 외모도 마음도 둥글둥글 그 자체였던 오다상과 조금 뾰족해 아주 뾰족한 걸 잘 못 받아들였던 나는 그 교수님에 대한 불평을 같이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는 선을 넘지 않으면서 둘만의 유머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날리곤 하였다. 실험 장치로 재밌는 상상도 해보고 결과를 보면서 마치 빵 같다, 코딱지 같다 라는 등 희화를 통해 우리는 우정을 쌓고 또 하루하루를 버틸힘을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맛있는 저녁을 사주겠다면서 식당에 가자는 그녀의 제안을 받았다. 한국에서 어른들이 밥 사 주시듯 일본의 야끼니꾸 (고기구이) 집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오다상을 따라가서 도착한 곳은 마치 해리포터 영화에 나올법한 조용한 가정집 같으면서 가게 이름만이 예쁘게 푯말처럼 걸려있는 음식점이었다. 들어가니 나와 오다상 둘 뿐이었고 예약을 해주셨다길래 앉았더니 영어로 뭔가 쓰인 물병을 웨이터가 가져와 나에게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인생 첫 파인다이닝이 시작되었다. 점원이 요리 하나를 가져와 이거는 양고기로 만들었고, 소스는 초콜릿을 사용하였으며 특별히 풍미를 위해 바삭한 크런치 형태로 만들었다고 전했다. 처음엔 너무 당황스러웠다. 일본어로 듣는 생소한 재료부터 살면서 맛보지 못한 맛과 식감이 내 혀로 마구 마구 들어오는데, 기억하고 소화하기에 벅찼다. 알다가도 모를 식사가 진행되었고 오다상과 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시에 식재료에 대한 재밌는 기억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아줌마는 멋지게 계산까지 마치셨다. 한국도 그러하듯 파인다이닝의 가격은 10만 원을 훌쩍 웃돈다. 장학금을 받더라도 자취생활을 하다 보니 계란밥이 주식이었던 나에게 이런 식사란. 바쁘게만 쫓겨 사는 것 같았는데 이런 나를 잠시 이상한 낙원(?)에 보내주신 것 같았다.


지금은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는데, 그럴수록 이 식사가 더욱 생각난다. 내가 과연 몇 개월 남짓 만난 10살 은 훌쩍 어린 여자 애에게 이런 식사를 대접할 수 있을까. 심지어 당시 오다상의 월급은 그리 높지 않았다. 오다상이 나에게 보여준 맛과 애정은 연구실을 가는 게 너무 싫어 하루가 끔찍했던 나에게 나의 자존감과 삶은 이런 맛도 있다고 알려줬다. 물론, 가격이 가치와 동등하진 않지만 우리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끼 식사를 최고의 음식과 서비스로 누군가가 나를 극진히 대접해 준다면 이는 스스로를 존중해 줄 수 있는 최고의 행위 아니겠는가.


그것도 한국인 여자아이한테 말이다. 그 일본인 아줌마가.



그리고 그 아줌마는 나에게 눈물 나게 따뜻한 마음을 나눠주었다. 말로 다 적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 또한, 재밌는 일도 많았다. 남편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빵 굽는 기계로 나에게 처음 만든 식빵을 선물하기도 하였다.


정말, 일본에서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친구들조차 조심스러워하고 한국어를 공중장소에서 하는 게 가끔 눈치 보이게 되는 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따뜻한 손길과 마음들이 나를 감싸주고 위로해주었다. 차가운 순간보다 따뜻한 기간이 길었기에 일본 유학을 잘 마칠 수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들 덕에 이렇게 이 글을 적을 수 있고 그렇게 미웠던 일본에게 조금은 마음을 쏟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무의식 중에 거리를 느낄 수 있고 소외시킬 수 있지만 내가 저 사람에게 좋은 기억과 추억을 심어준다면, 조금만 따뜻해진다면 이 온기는 결국 우리 사회로 , 나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난 성악설을 믿는다. 하지만, 사람과 이 사회를 바꾸는 것은 결국 사람이란 것 또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혹시 일본인을 만난다면, 왠지 조금 불편한 환경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마음으로 아주 작은 따뜻한 빵을 구워주면 어떤가. 그냥 따뜻한 인사와 한 발 먼저 다가가는 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결국 변화는 내가 만드는 것이다. 다른 이가 아닌 내가 말이다.


나도 이 지긋한 코로나가 끝나면 꼭 오다상을 한국 파인다이닝에 초대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맛과 멋 그리고 따뜻함을 맛보게 해드리고 싶다. 이런 작은 행동이 작은 대사관의 역할이다.


최근, 내 삶에 여러 도전을 하면서 오 다상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오다상은 대학 졸업 이후에 내가 내손으로 이룰 수 있는 일에 도전하고 싶어 전파도 터지지 않는 아무것도 없는 농장에서 돼지와 소를 관리하고 농장을 청소하는 일을 하셨다 한다. 뭐든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 어떤 도전과 행동도 가치가 있다는 것이 그녀의 말이었다. 우리도 해보기 전엔 모를 것이다. 작은 것부터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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