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시간은 오후 세시 반정도. 응? 우리 전화시간은 아닌데, 무슨 일이지?
반가운 마음에 얼른 받은 Facetime속에는 평소와 달리 웃음기 하나 없는 남자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는 롱디(Long-distance) 커플이다. 그리고 내 남자친구는 한국인이 아니다. 비행기로 6시간 정도의 거리에 살고 있는 남자친구와 나 사이에는 시차가 존재해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도 다르다. 그러기에 서로의 활동 시간에 차이가 있어 둘 모두에게 편한 시간대를 정해 전화를 하는 것이 버릇처럼 굳어졌다. 그리고 그 시간대는 하루 일과가 다 끝난 후, 자기 전 시간이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낮 시간대에 전화가 온 것이다. 낮에는 업무나 운동을 하느라 바빠 전화할 여유가 없는 남자친구가 오늘만큼은 내가 너무 보고 싶었나 싶어 들뜬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남자친구의 표정이 이상했다. 자신이 문자를 보냈는데 내가 문자를 보고 오해할까 봐 전화를 했다는 남자친구. 남자친구의 모국어도 나의 모국어도 아닌 제2 외국어, 영어로 소통하는 우리에게는 완벽하지 않은 영어 실력으로 인해 소통의 오류를 겪는 경우가 빈번했다. 오해를 만들기 싫어 바쁜 오후시간대에 전화까지 준 남자친구가 고마웠다. 나는 미소로 화답하며 아직 문자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전화로 알려주어 고맙다고 답했다. 그런데 남자친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오전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가 방금 전에 나왔다고 했다. 남자친구의 혈액검사 결과, 폐암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척도의 수치가 정상수치를 넘어선 결과가 나왔다고 말을 전해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순간 얼어붙었다. 올해 초 남자친구가 갑상선 암 판정을 받아 마음 졸이며 잠 못 자는 서너 달을 보냈다는 직장동료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남자친구는 해당 수치가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면서 비소세포폐암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최대한 감정적이지 않기 위해 애를 썼지만, 화면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공포감은 4000km를 건너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더 차가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정은 내려놓은 채 나라도 이성적으로 행동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걱정과 공포감은 뒤로 한 채 차분히 남자친구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남자친구의 이야기가 끝난 후 나는 그에게 폐암이 아닐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생각이 나는 대로 최대한 논리적으로 전했다. 만에 하나 폐암이 맞다 하더라도 우리가 조기에 발견했다는 점, 그리고 내 지인들을 통한 의료 인프라를 이용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최고의 의료진에게 수술과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항상 너의 곁에 있을 것이고, 이 문제는 우리가 같이 해결하고 이겨나갈 것이니 그것을 꼭 기억하라는 말을 전했다. 남자친구는 울먹거리며 고마움을 전했다.
남자친구와의 전화를 끊고 당장 인터넷에 들어가 해당 척도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척도의 정의, 수치의 크기에 따른 의미, 척도와 폐암의 관계성, 검사 결과의 오류 가능성, 추가로 필요한 검사 및 조치 등 닥치는 대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최대한 많은 정보로, 가능한 객관적으로, 남자친구가 폐암이 아닐 수 있는 확률을 높이고 싶었다. 더 나아가 폐암의 종류 및 수술 방법, 수술 후 생존율과 예후까지 찾아보고 나니 오히려 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사람,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엮여 그를 만나게 됐던 운명 같은 첫 만남의 날, 함께 쌓아온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들, 시도 때도 없이 같이 해맑게 그려나가던 우리의 미래. 이 모든 소중한 것들이 연기처럼 사라질까 봐 너무 무서웠다. 눈물을 간신히 참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노력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뭐지?
세상에서 그와 가장 가까운 사이인 나는 그를 곧바로 껴안아줄 수도 없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커다란 공간과 시간의 벽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 조그만 스마트폰에 엄지 두 개를 열심히 움직여대며 고작 정보를 찾거나 그에게 위안이 되는 메시지를 전송하는 게 전부라는 사실이 너무 속상하고 좌절스러웠다. 불안해하며 떨고 있을 그의 곁을 지켜주기 위해 비행기 스케줄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리 빨리 출발해도 나는 다음날 늦은 오전에나 도착하는 비행기가 최선의 선택이었고, 그 비행기 마저 평소 비행기 가격의 4배쯤 되었다.
너무 무력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허망했다. 애써 괜찮은 척하며 메시지를 보내는 남자친구의 말풍선 뒤에 불안해하는 그의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남자친구는 가장 빠른 시일 내로 폐 CT 검사를 예약했고 바로 다음날 아침 8시에 검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그의 곁에 도착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비행기의 도착 시간은 오전 9시 30분이었다. 걱정에 떨며 검사를 받으러 가는 길을 함께 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거대한 공간과 시간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지옥 같은 하루를 보냈다.
제대로 잠이 올리 없었던 나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잠에서 깼다. 전날에도 지겹도록 보던 폐암 환우들의 가족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커뮤니티 글을 읽고 또 읽으며 불안을 달래고 있었다.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CT 검사 결과 폐에는 아무 이상이 보이지 않고, 의사는 검사 결과가 위양성이었던 것으로 판단했다고 했다. 즉, 음성으로 나왔어야 할 검사결과가 검사의 정확도, 장비의 오염 등으로 인해 양성으로 나온 경우라는 것이다. 오..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전부 너무 감사합니다….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하루동안 쉬지 않고 롤러코스터를 타던 나의 마음이 드디어 멈춰 서서 안전벨트를 풀 수 있게 되었다. 남자친구에게 하루동안 맘고생 많았다고 격려한 후 사랑한다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폐암에 대해 찾아보던 하루동안 나에게도 큰 변화가 생겼다. 통계에 따르면 폐암 사망자 85%의 원인이 흡연이라고 한다. 전자담배를 끼고 살던 내가 간접흡연으로 남자친구의 폐암에 1%라도 악영향을 끼친 거라면 나를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에게 너무 화가 나, 그 자리에서 항상 나와 함께하던 전자담배 기기 2개를 바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는 앞으로 습관적인 흡연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수년간 이어지던 나의 흡연 역사는 끝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는 남자친구와의 이야기들이 새로운 역사로 쓰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