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숙제 2

by 온리원

"깡~ 여기!"

테이블마다 둥글고 묵직하게 생긴 까만 철판이 가운데 자리 잡은 닭갈비 집에 들어서니 먼저 도착해 창가에 자리 잡은 유진이 손을 들어 단이를 부른다.

"언니~ 오랜만이야!"

단이가 유진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들뜬 발걸음으로 다가간다.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단이의 두 손을 잡고 흔들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한다. 영락없이 해맑은 유진이다.

"이 놈 계집애, 결혼하고 나서 연락 한 번도 없고! 살아 있었네?"

빈정거리는 말투에 눈을 흘기는 유진이 밉지는 않다.

"에이~ 그래서 언니 보러 내가 왔잖아."

단이는 잘하지도 못하는 애교를 부리며 유진이 혹시라도 품고 있을 서운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유진은 닭갈비 2인분과 사이다 한 병을 주문했다.

기본 반찬들이 서빙되자 유진은 동치미 국물을 시원하게 마시고 무를 한 입 베어문다.

"여기는 닭갈비도 맛있는데 나는 이 동치미가 제일 맛있더라. 어떻게 지냈어? 애는 키울 만 해?"

자연스럽게 서로의 근황토크가 시작된다.


"어휴~ 말도 마.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옛말이 조금은 이해가 가. 내가 낳은 아이니깐 너무 예쁘긴 한데 가끔은 벅차고 힘들 때도 있어. 잘 키우고 있는 게 맞나 싶을 때도 있고....... 지우가 태어난 후로 남편이랑 더 많이 싸우는 것 같아. 남편도 집안일이랑 육아를 같이 하고 있긴 한데 뭔지 모를 서운함이 생기더라고. 오롯이 나만 받던 사랑을 나눠 받아 그런가? 하하하~" 단이가 멋쩍은 듯 웃으며 새콤달콤한 동치미를 맛본다.


"지난준가? 시댁 다녀왔는데 곧 복직할 거라니까 시고모님이 애는 누가 봐주냐고 하시는 거야. 그래서 아파트 단지 내 가정 어린이집 보낸다니깐 요새 젊은 엄마들은 독해서 어린이집 보낸다고, 애가 불쌍하다고 하는 거야.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시부모님은 오히려 '복직 앞두고 마음이 복잡하겠네, 건강 더 신경 써라'하면서 걱정해 주시는데 시고모가 뭔 상관이라고 그런 소릴 하시는지 완전 뚜껑 열렸잖아? 자기가 애 봐줄 것도 아니면서...... 독해? 누군 뭐 어린이집 보내고 싶어서 보내나? 상황이 그러니깐, 어쩔 수 없이 보내는 건데...... 하아....... 표정 관리 안 돼서 남편 불러내서 뭐라 했어. 한 번만 더 시고모님이 저런 말씀하시면 나 시댁 안 온다고....."

그날의 불쾌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단이는 흥분하고 말았다. 그러다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자신의 모습에 '내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하고 놀랐다.

이를 눈치챈 유진이 물었다.

"그래서 남편은 뭐래? 정훈씨는 어떤 반응이었어?"

"뭐래긴. 내 편들었지. 자기 고모 왜 그러냐면서, 당신도 딸 있으면서....... 고모 딸 시집가면 자기가 지켜보겠다고, 다음에 또 이상한 소리 하면 자기가 뭐라 하겠다고 해서 대충 기분 풀고 들어갔어."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내 얘기, 그것도 시댁식구 험담만 한 것 같아 머쓱해진 단이는 화제를 돌렸다.

"언니는 어떻게 지냈어?"

마침 은쟁반에 양배추, 고구마가 산처럼 쌓이고 위에 푸짐하게 얹어진 닭갈비가 나왔다. 직원은 능숙한 솜씨로 재료들을 철판 위에 펼쳐 섞었다.

"나야 뭐, 아침에 남편 출근 시키고 나면 오전엔 집안일하고, 오후에 학교랑 유치원 끝나서 애들 오면 미술 가르치고 살지~ 가끔 시간 되는 친구들이랑 점심도 먹고 친정엄마랑 쇼핑도 다니고 그래."

유진은 단이가 물어보기 전에 먼저 불임 얘기를 꺼낸다.

"나 요새도 계속 임신 안 돼서 시험관 시술 하고 있어. 한 번 실패하고 두 번째 준비 중인데 생각보다 힘들더라. 너 자연 임신한 거 정말 복 받은 줄 알아야 돼~"

유진은 자신의 말이 분위기를 무겁게 만든 것 같아 철판 속 닭갈비를 뒤적거렸다.


"고구마랑 떡 다 익은 것 같은데 먼저 먹자. 춘천에서 닭갈비 오랜만에 먹지? 복직계 냈으면 출근은 언제부터야?"

'복직'이라는 단어를 듣자 단이는 고구마를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이 느껴져 선뜻 고구마에 손이 가질 않았다. 달달하고 맛있게 잘 익었을 고구마인데 말이다.


단이의 답답함은 사실 복직계를 제출한 날부터 시작되었다. 잔병치레가 많은 지우가 걱정돼 가급적이면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발령을 희망한다고 하자, 희망보직제는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인사담당자에게서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이는 대도시의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이라 이동을 해 봤자 그 도시 내에서 움직이지만, 시 경계에 거주하고 있어 반대편 시 경계까지는 1시간이 걸렸다. 혹시나 집에서 먼 곳으로 발령 나면 예상했던 출퇴근 시간을 맞출 수 없어 지우가 어린이집에 오래 있어야 하는 게 걱정이 된 것이다.

아직 미혼인 것 같은 여직원을 향해 '그래도 긍정적으로 한번 검토는 해 주세요'하고 최대한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속으로는 '너도 결혼하고 애 낳아서 한 번 겪어보면 내 심정을 알 거다!'하고 야속해했다.


"아직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는데 보통 7월 초나 중순이면 정기인사 하니깐 그때가 되지 않을까 싶어. 그럼 한 달 정도밖에 안 남은 거잖아. 복직하면 더 시간 없을 테니 그전에 그동안 보고 싶었던 사람들 다 만나려고~ 언니가 일빠야. 영광이지? 호호호~"

"그래, 영광이다~ 얼른 먹어. 2차 가야지!"

둘은 쌈야채 위에 닭갈비와 마늘, 쌈장을 넣고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한다.

단이는 복직을 앞두고 혼란스러운 감정들도 이렇게 쌈 싸서 꿀꺽 삼켜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이 폭풍 검색으로 찾았다는 소양강 댐 근처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널찍하고 탁 트인 테라스에서 소양호가 한눈에 보이는 카페는 그야말로 뷰맛집이었다. 평일 낮 시간인데도 테이블은 만석이었고,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연인은 주문한 커피와 조각 케이크를 맛보기 전에 휴대폰으로 한참 동안 사진을 찍어댔다. SNS에 올릴 감성 돋는 사진을 한 장 건지려나 보다.


마침 일어나는 자리가 있어 둘은 운 좋게 전망 좋은 테이블을 차지할 수 있었다. 단이가 호수를 보며 감상에 젖어 있는 동안 유진이 시원한 아메리카노 두 잔과 휘낭시에를 들고 왔다.

"언니, 나는 이게 로망이다? 남들 일하는 평일 낮에 카페에서 사색하는 거...... 소소하지만 행복해. 그래서 복직하면 가끔 연차 쓰고 나만의 시간을 즐기려고...... 안 그러면 너무 힘들 것 같아."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워킹맘의 일상이 단이에겐 벌써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맞아. 누구나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은 있어야지. 나는 처음 시험관 실패했을 때 너무 속상하고 울적해서 한동안 밖에 나가지도, 사람들도 만나지 않았어. 외출하다 우연히 아기를 안은 사람들을 마주치면 괜히 서럽더라고. 남들에겐 자연스럽고 별 일 아닌 일이 왜 나에겐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화도 나고 슬프고 뭐, 감정이 통제가 안 돼서.........." 유진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다 "지금은 괜찮아. 그러니깐 이렇게 너 만나지. 아직도 지하 땅 속에 있었으면 연락도 안 받았을 거야." 하고 단이를 안심시켰다. 꺼내고 싶지 않았던 속마음을 말하고 나니 오히려 유진의 마음은 소양호의 물결처럼 잔잔해졌다.


단이는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무심코 뱉었던 말이 후회됐다. 경험하지 않고서 얼마나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을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을 좋아하는 유진이 불임으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텐데 생각 없이 말한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차라리 어디가 안 좋아서 임신이 안 되는 거면 그걸 고치면 되는데, 원인을 모른다니깐 더 환장하겠는 거야. 배아 이식하고 피검사했을 땐 임신이 확인 됐는데 초음파 검사에서는 아기집이 안 보이더라고...... 왜 나한테 이런 역경이 오나 싶었는데 나만의 동굴에 갇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관점을 바꾸면서 깨달았어. '역경'을 거꾸로 하니 '경력'이더라고..... '이 역경도 내 인생에 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경력이 되겠구나' 생각하니까 앞으로의 어떤 시련도 감당할 자신감이 생기는 거야. 너도 복직해서 사람들 만나고 일하다 보면 역경을 마주할 때가 있을 텐데 네 인생에 경력을 쌓는다 생각해. 그럼 버틸 수 있을 거야."

인생 선배 유진의 조언에 단이의 미안한 마음은 고마움으로 바뀌었다.

"다음은 누구 만날 거야? 내가 일빠라며~"

"아직 안 정했어. 한동안 못 보고 지낸 친구들도 보고 싶고, 공무원 입사하기 전에 다녔던 직장 동기도 한번 보자곤 했는데 생각처럼 쉽지가 않네? 왜, 학교 다닐 때 개학식 앞두고 밀린 일기 쓰고 숙제하고 그랬잖아. 꼭 그런 기분이야. 평소에 시간 있을 땐 안 한 건지 못한 건지 자꾸 다음에 만나자 하고 미루고 말이지. 이러다 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어~ 하하하"


단이는 아메리카노를 다 마시고 남은 얼음을 하나 꺼내 입 안에서 천천히 녹인다.

녹여 천천히 먹을 수도, 깨물어 빨리 먹을 수도 있는 얼음처럼 시간도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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