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 정기 인사예고가 공지됐다.
인자는 내심 이동을 기대했지만 그녀의 이름은 명단에 없었다. 갑자기 일할 맛이 나지 않았다.
사무실을 나가 구청 1층 로비 한 면에 자리 잡은 북카페에 앉았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고 아무 책이나 하나 꺼내 들어 펼쳤지만 눈에 들어오는 글씨는 없었다.
구청 직장 어린이집에 두 아이를 보내고 있어 구청 근무를 희망했던 인자가 전보를 원했던 이유는 이 부서에 근무한 지 2년이 넘어 지루함도 있었지만 시청에서 근무하는 게 근평을 잘 받아 승진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컸던 것은 부서장인 박 과장과 함께 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상반기 인사에 발령받아 온 박 과장은 소위 말하는 요직에만 있었던 잘 나가는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구청의 다들 기피하는 부서로 좌천되어 온 것은 당시에 큰 이슈였다.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업체에게 향응을 받은 게 걸려 징계를 받아 문책성 인사다, 부하 직원에게 막말을 해 신고가 들어갔다, 시의원에게 하극상을 저질렀다, 등 그의 인품을 말해주는 좋지 않은 소문이 떠 돌았다. 직접 보고 확인한 것이 아니어 진실은 알지 못하지만 반년 간 함께 근무하면서 겪은 그의 성향에 비추어 봤을 때 무성했던 소문들이 결코 아니 땐 굴뚝은 아니었음을 느꼈다.
'이미 다 끝난 걸 어쩌겠어. 구관이 명관이라고 더 별로인 사람들도 있으니 그냥 감수하자.'
인자는 북카페에 앉아 감정을 추스르는 그 5분도 근무시간이란 사실에 마음이 불편해 책을 덮었다. 구청 직장어린이집 아이들이 산책을 다녀오는지 선생님 뒤로 두 명씩 짝을 지어 손을 잡고 줄지어 입구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혹시나 아이들이 엄마를 발견하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 재빠르게 계단을 올라 사무실에 들어갔다.
'괜찮아. 다음이 있잖아. 내 할 일만 잘하면 되지 뭐.' 주문을 외듯 스스로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본다. 체념을 하고 나니 공지사항을 보고 올라온 실망감과 우울함이 조금은 회복된 듯했다.
"인자씨, 인자 왔어? 하하하~ 7급 때가 제일 좋았던 것 같아. 위로 올라갈수록 직원들이 어려워하니 상대도 안 해주고 외롭네~" 박 과장은 인자 옆에 비어 있는 바퀴 달린 둥근 보조의자에 앉으며 친근한 척 말을 건다.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박 과장이 인자의 콤플렉스인 이름으로 유희를 하는 것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배 부른 소리 하고 있네. 5급은 고사하고 6급만이라도 달았으면 좋겠구먼. 외로울 새가 어디 있어? 나보다 월급 많이 받으면 일도 그만큼 더 많이 해야 하는 거 아냐?' 인자는 과장이라는 직위의 무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얄팍한 생각일 수도 있겠다고 자성을 했지만 그저 박 과장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이런 인자의 불편한 심기를 알 리 만무한 박 과장은 계속 말을 건다.
"그거, 내가 검토하라고 한 거는 어떻게 됐지?"
"아...... 그건..... 법적으로 할 수가 없는 거라...... 법을 위배하면서까지 할 순 없잖아요. 팀장님이 말씀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인자는 겨우 추스른 감정에 또 불을 지르는 박 과장이 야속했다.
'만만한 게 난가, 꼭 팀장님이 출장 나가고 없을 때만 와서 왜 그러는 건데!!'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현재 나의 근평은 이 사람에게 달려있으니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을 해야 한다.
"팀장님 오시면 다시 상의해 볼게요."
팀장과 상의해 봤자 답은 뻔했지만 이 불편한 상황을 끝내기 위해서는 일단 여지를 남겨야 했다.
박 과장은 원하던 답변이 아니었기에 친근하게 굴던 기색을 접고 진지한 표정, 그러나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협박의 눈빛을 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두 번 본 표정이 아니었기에 이젠 더 이상 불편하지도, 걱정스럽지도 않다. 박 과장 덕분에 '그러려니'하는 마인드를 얻게 되었다. 인자는 '팀장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제 할 일을 한다.
길게만 느껴진 하루가 지나고 오후 6시, 퇴근 시간이 다가온다.
인자는 원하던 인사가 아니어 실망스러웠던 하루를 남편인 상태와 함께 두 아이를 재우고 난 뒤 시원한 맥주에 박 과장을 안주삼아 마무리하고 싶었다. 둘은 같은 시에 합격한 입사 동기로 첫 부서에 함께 배정받아 만나게 되었다. 신입 시절을 서로에게 의지하다 정이 들어 연애를 하게 된 것이 결혼까지 이어져 부부공무원이 된 것이다. 인자는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을 잘해주는 상태가 좋았다. 다소 보수적이고 수직적인 조직 생활을 어려워했던 자신과는 달리 상태는 어떤 사람과도 잘 어울렸고 어느 부서에 배치되어도 잘 적응했다. 인자에겐 부족한 면들을 갖고 있는 상태가 부럽기도 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부럽다고 말한 적은 없다.
퇴근 시간을 알리는 음악이 구청에 가득 울려 퍼지자 인자도 사무실을 정리하고 두 아이를 하원시키러 직장 어린이집이 있는 1층으로 향한다. 직장에서는 퇴근을 하지만 두 아이 하원과 동시에 육아 출근은 시작된다.
"띵동~ 띵동~"
인자는 열매반 벨을 눌렀다. 어린이집의 일과가 끝나는 오후 5시 이후에는 영아반과 유아반으로 나뉘어 연장보육이 이뤄지는데 이번 달 유아반은 열매반 교실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엄마~~~~!!!"
6살 딸 민서와 5살 아들 민찬이 서로 엄마에게 먼저 안기겠다고 달려오는 뒤로 두 아이의 가방을 든 선생님이 흐뭇한 미소로 바라본다. 엄마를 반기는 두 아이를 보니 낮에 가졌던 속상하고 실망스러웠던 감정이 싹 달아났다.
"민서랑 민찬이 잘 놀았어? 선생님께 인사하고 가자~"
인자는 하루종일 아이들과 씨름했을 선생님의 수고를 알기에 1분이라도 빨리 하원시켜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안녕히 계세요~" 두 아이는 공손하게 배꼽인사를 하고 인자는 아이들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인사를 한다.
"고맙습니다. 내일 뵐게요~"
어린이집 현관문을 나서자 두 아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복도를 뛰어간다. 매일 하원할 때마다 남매의 복도 레이스가 펼쳐진다. 로비 중앙의 의자에 먼저 도착해 앉는 사람이 엄마와 자는 것이라고 둘이 룰을 정한 것이다. 네 식구가 패밀리 침대에서 다 같이, 아이들은 항상 엄마 양쪽에 한 사람씩 붙어 자면서도 의미 없어 보이는 내기를 위해 둘은 매일 뛴다. 그냥 달리기만 해도 좋은 나이지만 아이들도 어떤 목표가 있어야 승부욕이 생긴다는 것을 아는 것인가?
[나 오늘 급 회식 생겼어. 과장님이 팀장들이랑 차석들 저녁 먹자고 하시네 ㅡㅡ;]
남편의 메시지를 받고 인자는 인사예고 공지를 봤을 때보다도 더 실망스러움을 느꼈다. 육퇴 후 상태와 한 잔 할 생각에 집으로 다시 출근하는 발걸음이라도 가볍게 느껴졌는데, 역시 세상은 내 뜻 때로 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서글퍼졌다. 나와 가정보다는 직장이 우선인 것 같은 상태에게 서운했다.
'내가 이번 인사에 이동하길 바랐던 것을 분명 알고 있었을 텐데 위로는커녕 조직에 충성이라니.......'
인자는 못마땅한 마음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로비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아빠 오늘 저녁 드시고 온대. 가자~' 하고 짧게 말하며 손을 잡는다. 민서와 민찬이를 각각 카시트에 앉히며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이 힘들어 나온 것인지, 희망했던 일들이 체념으로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