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 정기 인사로 어수선했던 사무실 공기는 일주일이 지나니 안정감을 찾았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으로 1년이 조금 넘는 기간의 업무 공백이 있었지만 단이는 금세 새 부서에 적응했다. 사무적인 일처리는 몸이 먼저 기억하고 반응을 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낯가림이 있는 편이라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기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성격 좋아 보이는 팀의 차석, 인자와 아직은 신입이라 어리숙하지만 천진난만한 패기를 갖고 있는 상훈이 한 팀이라 의자가 되었다. 게다가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었던 정 팀장도 같은 워킹맘이라며 팀원들을 살뜰히 챙기는 것 같아 내심 다행이라 생각됐다.
정 팀장은 공무원스럽지 않은 세련된 외모와 옷차림, 도도해 보이는 이미지 때문에 골드 미스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무려 아이가 셋인 워킹맘이었다. 딸 하나 키우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단이는 정팀장에게 존경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인자와, 셋을 키우는 팀장, 단이는 일과 육아에 있어 든든한 인생 선배가 팀에 두 명이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엄마도 처음이고, 워킹맘도 처음이라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잘하고 있는 건지 문득 확인받고 싶어질 때 두 사람은 큰 조언자가 되어 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자자, 정리하고 갑시다~!"
과 송환영회가 있는 날이라 퇴근시간이 되자 주무 팀장은 모두에게 들으란 듯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보안 점검은 제가 하겠습니다!"
일주일 새 조직 문화에 적응을 했는지 눈치가 빠른 신입, 막내 상훈이 보안 점검표를 뚝딱 작성해 기안 상신을 마쳤다. 주무 팀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썰물 빠지듯 직원들은 사무실을 나갔다. 회식 장소는 구청 앞 삼겹살 집. 회식으로는 제일 만만하고 뻔한 메뉴다.
시끌벅적한 식당 안쪽으로 닫혀있는 미닫이 문이 열리자 테이블들이 길게 붙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회식 장소임을 알 수 있는 공간이다. 여전히 이 사람들과의 회식 자리가 낯설기만 한 단이는 어디에 앉아야 하나 두리번거리며 고민하고 있을 때, 주무팀장이 인사이동 대상자들은 가운데에 앉으라며 손짓을 한다. 복직한 단이와 신입인 상훈은 어쩔 수 없이 박 과장이 자리한 테이블로 배치되었다. 두 사람이 어색해하는 걸 눈치챈 정팀장은 자연스럽게 박 과장 옆자리에 앉았다.
모든 직원이 모이자 주무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회를 봤다. 전입·전보 대상자들을 인사시키며 한 마디씩 소감을 말하라고 한다. 이어서 복직한 단이와 신입인 상훈에게도 한 마디 하라고 일으켜 세웠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복직한 강단이라고 합니다. 이제 일주일 밖에 안 지났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일한다는 게 참 쉽지가 않네요. 워킹맘, 워킹대디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제가 좀 낯을 가려서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긴 하는데요, 어려운 사람은 아니니 친근하게 대해주셨으면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단이가 씩씩하게 인사말을 끝내자 그녀에게 집중했던 직원들은 모두 환영의 박수를 쳤다.
"강단이 씨, 강단 있네~! 허허허~"
박 과장은 또 이름으로 시답잖은 언어유희를 한다.
"반갑습니다! 유상훈입니다. 제대로 된 사회생활은 처음이니 선배님들의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상훈은 간결하고 깔끔하게 소개를 마쳤다. 사회생활이 처음이라고는 했지만 어딘지 모를 노련함이 배어 있는 듯했다.
단이의 복직 첫 회식이 시작되었다. 정팀장은 투명한 글라스에 소주를 한 잔 넣고 시원한 병맥주를 반쯤 따른 뒤 숟가락을 잔 가운데에 꽂고 능숙한 솜씨로 세게 내리쳤다. 새하얀 거품들이 올라와 크림처럼 부드럽게 잔을 덮었다. 박 과장은 소맥잔을 들고 전체를 둘러보며 건배사를 했다.
“자, 모두 잔들 채웠지? 전출 가신 분들은 새로운 부서에서 열심히들 하시고, 전입 오신 분들은 즐겁고 편안하게 일해 봅시다! 이 모든 것을 위하여~!!"
과장, 팀장이 첫 잔을 원샷하니 마주 앉은 단이와 상훈도 따라 잔을 비웠다. 빈 속을 훑고 내려간 시원한 소맥은 짜릿했다. 지우가 돌이 될 때까지 모유를 먹였기에 단이는 임신 후로는 처음 마시게 된 술이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금방 취할 것 같아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알싸한 기분이 싫지만은 않았다.
"근데 인자 씨는 어디 갔어? 안 보이네???"
박 과장이 인원 체크하듯 방 안을 주욱 둘러보던 순간, 미닫이 문이 열리면서 인자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인자, 인자 오네? 하하하~ 애들도 그냥 데리고 와서 고기 먹이지, 뭘 왔다 갔다 해~ 늦게 왔으니깐 벌주~!!"
회식이 시작된 지 1시간도 안 되었는데 벌써 취한 건지, 인자를 더 먹이려는 속셈인 건지 박 과장은 벌주라며 소맥 2잔을 연거푸 말아 인자에게 전달했다. 인자는 직장 어린이집에 다니는 두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올 거라 조금 늦는다고 팀원들에게는 귀띔을 했는데, 이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꼭 벌주까지 먹이려는 박 과장이 더 꼴 보기 싫었다.
회식 분위기가 무르익자 직원들은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잔을 주고받기도 했고, 눈치껏 슬쩍 빠져 빈자리도 하나 둘 생겼다. 단이는 첫 회식에서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정신을 차렸다. 회식 분위기에는 동참하되 취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취기가 조금 올라오는 것이 느껴지자 화장실을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이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 깊은숨을 내쉬며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신도 차릴 겸 근무 시간에 바빠서 확인하지 못한 키즈노트 알림장을 켰다.
[기분 좋게 등원한 지우는 오전 죽도 잘 먹었습니다. 오늘은 9월 생일파티로 토끼반 윤서와 기린반 서하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어요. 낮잠을 자면서 좋지 않은 꿈을 꿨는지 깨서는 조금 보챘답니다. 어머니의 복직 후 지우가 불안해하는 모습이 가끔 보일 때가 있는데 더욱 신경 써서 돌보겠습니다.]
'아, 생일 선물......' 그제야 어린이집에 생일 선물을 보내지 않은 게 생각났다.
그저께는 급하게 준비하다 양말을 짝짝이로 신겨 보냈고, 어젠 항상 가방에 챙겨져 있어야 하는 가제손수건과 여벌 옷을 빼놓고 빈 가방만 보냈다.
'내가 이렇게 멀티가 안 되는 사람이었나?' 단이는 갑자기 자괴감이 들었다. '짝짝이 양말을 신고 등원한 지우를 본 선생님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준비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나를 이해하실까? 이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이었나?' 키즈노트 알림장의 짧은 메모는 단이에게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나비효과가 되었다.
일과 육아는 단이에게 잡히지 않는 두 마리 토끼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