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두 아이를 하원시켜 친정에 맡기고 회식 장소로 다시 돌아가는 길은 퇴근 시간의 정체로 늦을게 뻔했고, 박 과장의 벌주를 면치 못할 걸 알기 때문이다.
'30분에 폭탄주 1잔이니 최소 2잔은 마시겠구나.' 경험에 비추어 벌주가 계산되자 조급해진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벌주는 박 과장의 눈을 피해 요령껏 테이블 아래로 버려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구청에 도착했다. 인자는 주차를 마치고 회식 장소인 식당으로 향했다.
미닫이 문을 열자 하필 가운데 앉은 박 과장과 눈이 마주쳤다.
인자를 향해 '인자, 인자 오네?'라며 여전히 재미없는 농담과 함께 벌주라며 소맥 2잔을 내민다.
이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인자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박 과장 바로 옆 자리에 앉은 정 팀장이 나섰다.
"과장님, 요새 회식 문화 많이 달라진 거 모르세요? 벌주 같은 거 하면 벌 받아요~ 익명 게시판에서 유명해지고 싶으세요? 호호호~" 정 팀장은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으로 위기에 빠진 인자를 구해줬다.
"인자씨, 애들 데려다주고 오느라 정신없겠지만 얼른 저~기 빈자리 가서 앉아. 고기 먹고 힘내야지? 과장님, 한 잔 더 하시죠?" 정팀장 덕분에 인자는 박 과장과 멀리 떨어진 구석의 빈자리로 갈 수 있었다. 박 과장을 전담 마크하면서 이렇게 팀원들을 챙기는 그녀에게서 직장인 고단수의 향기가 풍겼다.
인자는 분위기가 무르익은 테이블에 앉아 평소에는 각자의 업무로 사적인 대화조차 하지 못했던 다른 팀원들과 이야기 꽃을 피우며 고픈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요즘 MZ세대들은 저녁 회식을 좋아라 하지 않는다지만, 송환영회는 육아로부터 공식적인 해방의 날이니 인자는 회식 자리가 싫지만은 않았다.
박 과장의 벌주는 받기 싫었지만, 스스로가 원해서 제조한 소맥의 맛, 특히 첫 잔의 시원함은 하루의 온갖 피로를 녹여주는데 충분했다. 낮의 업무 스트레스도, 엄마를 찾는 두 아이도 다 잊고 오롯이 나를 위해 즐길 수 있는 시간이다. 근무의 연장선상이란 사실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시끌벅적한 삼겹살집에서의 1차가 끝나고 직원들은 하나둘씩 가게 앞으로 나와 모였다. 진작에 눈치껏 도망간 사람을 제외하고는 술을 아예 마시지 못해 멀쩡한 사람, 취기가 올라 비틀거리며 2차를 가자고 들떠 있는 사람, 이런저런 광경을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소 짓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각양각색의 모습들을 하고 있는 부서 사람들을 보니 '역시 사람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평소 말이 없어 보였던 이들도 자연스럽게 무리에 섞여 잘 어울렸고, 오히려 2차를 주도하며 나설 줄 알았던 이는 회식 중간에 사라져 안 보이니 말이다.
팀의 차석인 인자는 사회화된 책임감에 회식을 마치고도 팀장과 팀원들을 챙겨야 했다. 조금 전 회식자리에서 옆 팀의 팀장이 인자에게 자기 팀 차석은 팀장이며 팀원들을 챙기지 않는다고 불만을 늘어놓는 것을 들으니 팀장들은 다들 그런 기대가 있는 것 같아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팀장은 그럴 분이 아닐 것이라 여겼지만 세상에 챙김 받기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 싶어 주위를 둘러보며 정 팀장과 단이, 상훈을 찾았다.
신입인 상훈은 어느새 다른 팀 막내 직원들과 어울려 2차로 노래방을 가느냐, 맥주를 마시러 가느냐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고, 정 팀장은 주무팀장과 함께 박 과장을 보내려 택시 승강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단이씨는 어딨지???' 인자는 여기저기 둘러보다 멀리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단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축 처진 어깨가 더 가냘파 보여 신경이 쓰여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 본 단이의 눈가는 무슨 일인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인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황급히 전화를 끊은 단이는 아군을 만난 것 같은 반가운 표정도 잠시, 감정이 복받쳤는지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네온사인의 화려한 불빛과는 대조적인 단이의 감정 상태를 인자는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