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귀한 손님처럼 여기라'는 문장의 울림으로 한동안 인자는 남편과 두 아이들을 대할 때마다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같은 상황이었어도 마음가짐을 다르게 하니 이전과는 다른 반응을 하게 되었다. '욱'하고 올라오는 순간의 화나는 감정을 절제하고 아이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를 한번 더 생각하게 되니 감정표현도 학습과 훈련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직장에서도 사람들과의 관계가 한결 수월해졌다. '가화만사성'이라더니, 하는 일이 다 순조롭게 풀리는 것만 같았다.
딱 한 사람, 박 과장을 제외하고는.
박 과장은 지인과 관련된 일을 시키는 대로 처리하지 않자 사사건건 인자가 맡고 있는 업무에 태클을 걸었다. '너는 얼마나 청렴하고 도덕적이길래 그러냐'는 날 선 시선으로 인자를 대하곤 했던 것이다. 박 과장이 지시한 일은 지인 업체의 자재를 사용하라는 것이었는데, 과거 유사한 일로 곤란한 경험이 있었던 인자는 조심스럽게 그 부탁을 거절했다. 박 과장은 '부탁'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인자가 받아들이기엔 '청탁'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날 부서 회식 자리에 초대받았다고 나타난 지인이 식대를 계산한 것이 영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지인이란 사람은 건설 자재를 영업하는 이사로 중년의 여성이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겉모습이 건설 자재와는 어울리지 않았을뿐더러 자재의 우수성과 같은 제품 홍보보다는 윗선과의 친분으로 영업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자는 가족이건 친구건, 직장 동료건 거래처건 상호 간의 신뢰를 중요하게 여겼다. 모든 일에서 선택과 결정의 책임은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 어떻게 모든 사람하고 원만하게 잘 지낼 수 있겠어. 다음 인사땐 둘 중 하나는 이동하겠지.'
박 과장이 사소한 일로 태클을 걸 때면 이젠 익숙한 듯 인자는 그러려니 하고 만다. 그런 날에는 저녁 식탁에서 상태에게 미주알고주알 박 과장을 험담 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푼다. 인자의 소소한 낙이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눈이 부신 날이다.
팀원들과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 함께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 손에 들며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 인자는 무리에서 이탈해 잠시 약국에 들렀다. 혹시나 누가 주변에서 볼까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임신테스트기를 하나 구입했다. 임신테스트기를 재빨리 바지 주머니에 넣자 가슴이 콩닥거렸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심장이 두근거린 건, 설마 두 줄이 나오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함 때문이다.
'요새 피곤하고 예민해져서 생리주기가 불규칙해진 걸 거야.'
'그래도 예정일보다 일주일이나 늦게 한 적은 없었잖아?'
'만약 두 줄이면 어쩌지?'
여러 가지 생각들로 혼란스럽고 임신테스트기의 결과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인자는 바로 테스트해보진 않았다. 아침 첫 소변이 가장 정확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이잉~'
때마침 남편 상태에게서 온 문자의 진동으로 인자는 복잡한 생각들을 멈출 수 있었다.
[나 오늘 교육 일찍 끝날 것 같은데 민서랑 민찬이 내가 하원시킬게]
두 아이를 하원시키겠다니 이 보다 더 반가울 수가!
인자는 갑자기 얻게 된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졌다. 남편이 일찍 퇴근한다니 경순이랑 정윤이나 만날까? 생각해 본다. 셋이 모여 있는 단톡방에 급 번개모임을 제안하니 마침 다들 약속이 없다며 좋다고 한다.
오후 업무가 시작되었지만 인자는 집중이 되질 않았다.
친구들과 어디서 만나 무엇을 먹을지를 정한다는 것에 기분이 들떠서이기도 했지만, 가방 속에 던져 놓은 임신테스트기가 자꾸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하려고 샀는데 아무래도 빨리 해 보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화장실 문을 잠그고 임신테스트기 박스를 뜯었다. 변기에 앉아 소변을 묻힌 뒤 테스트기를 들고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머릿속을 비웠다. 눈을 뜨고 테스트기를 보니 검사선과 대조선에 선명하게 두 줄이 떠 있었다. 너무도 명확한 두 줄이어서 아침 소변은 필요도 없었다.
인자는 머리가 하얘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승진을 목전에 두고 다시 육아휴직을 해야 한다니.....
민서와 민찬이 어느 정도 커서 이제 좀 편해졌는데 다시 신생아를 키워야 하다니......
밤에 잠 못 자고 똥기저귀 치우고 이유식 만들기를 또 해야 하다니......
남녀가 만나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아 완벽한 4인 가족을 구성한 것으로 인자는 인생 계획을 잘 세웠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계획에 없던, 계획하지 않았던 셋째라니.
계획적인 삶을 살아왔던 인자에게 임신테스트기의 두 줄은 방심의 결과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