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션 너머로 보인 인자의 표정이 어두웠다.
분명히 심각한 일이 생긴 것이다. 단이는 인트라넷 메신저로 인자에게 쪽지를 보냈다.
[주무관님, 안색이 안 좋으신데 무슨 일 있으세요??]
[어..... 개인적인 일인데 나중에 말해줄게.]
아직은 말을 아끼고 싶어 하는 인자를 존중해 주고 싶어 단이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 후로도 인자는 업무를 하다 말고 멍하니 딴생각에 잠기곤 했다.
'박 과장이 또 괴롭혔나? 남편하고 싸웠나? 애들이 아픈가?'
개인적으로 심각해질 만한 일들을 생각해 봤지만 단이는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인자가 먼저 얘기해 줄 때까지를 기다리면서 업무에 집중해 본다.
5시가 가까워오자 상태에게서 문자가 왔다.
[구청에 도착했어~ 애들 하원시킬게.]
상태가 왔다는 메시지에 인자는 1층으로 내려갔다.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한 인자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되지 않았다.
인자를 보고 반가운 것인지, 교육이 일찍 끝나 기분이 좋은 것인지 자동문을 들어서는 상태의 표정은 밝았다. 인자와는 대조적으로.
답답하고 속상한 심정이지만 무덤덤하게, 그리고 무미건조하게 중대한 사실을 전했다.
"셋째 생겼어."
어린이집을 향하던 상태의 발걸음이 멈췄다. 인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상태는 헛웃음을 지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떡해. 나도 이제 승진해야 하는데 또 휴직하면 한참 밀릴 거 아냐. 민서랑 민찬이도 좀 커서 살만하다 싶었는데 밤에 잠 못 자고 똥기저귀 갈고 이유식 만들고 휴~~~~~ 어떡해?"
축하도 위로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버린 상태가 겨우 한 말이라곤 멋대가리 없는 모범답안이었다.
"어떡하긴~ 낳아야지."
핑 돌았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둘째를 낳고 더 이상의 자녀 계획은 없으니 정관수술을 하라고 했지만 정력이 떨어지고 성욕이 줄어든다는 속설 때문에 미루기만 하다 이 지경이 된 것 같아 상태가 원망스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는 휴직 한번 하지 않아 먼저 승진도 했는데 아내의 입장이 되어 속상한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것이 서운하고 화가 났다. 더 이상 상태와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 오늘 정윤이랑 경순이 만나 저녁 먹고 갈게. 민서랑 민찬이 먼저 재워."
인자는 아이들의 하원을 보지 않고 무뚝뚝하게 일정만 통보한 채 사무실로 올라갔다. 내심 상태가 축하해 주길 바랐던 걸까? 아니면 같이 걱정하다 그래도 잘 키워보자는 응원을 원했던 걸까? 사실 상태가 어떤 반응을 했어도 원망스럽고 야속했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경순과 정윤과의 만남은 맛집이 많은 구청 주변에서 갖기로 했다. 이제 태교를 시작해야 하니 먹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인자는 고기와 야채를 동시에 먹으면서 담백한 국물까지 맛볼 수 있는 샤부샤부를 추천했다. 식당은 사무실 바로 앞이라 제일 먼저 도착한 인자는 수저를 깔고 물컵에 물을 따라 놓으며 테이블 세팅을 마치고 친구들을 기다렸다.
문 앞에서 만났다는 정윤과 경순이 함께 들어왔다.
"지안이, 잘 있었어? 호호호~"
경순이 웬일로 '말자'가 아닌 인자가 개명을 신청한 이름을 불렀다. 지난번 별명을 부른 장난에 인자가 언짢아한 기색을 눈치채긴 했나 보다.
"어. 맨날 똑같지 뭐~ 내가 미리 주문해 놨어."
싱싱한 야채와 칼국수면, 선홍색 소고기가 서빙되고 냄비 속 간장육수가 보글보글 조금씩 끓기 시작한다.
경순은 배가 고프다며 초승달 모양으로 얇게 썰어진 단호박과 줄기가 하얀 배추, 샤부샤부에서 빠질 수 없는 숙주나물을 하나둘씩 넣으며 이 모임의 총무를 맡은 인자에게 물어본다.
"우리 이제 여행계비 꽤 모았지? 7년 가까이 됐는데 얼마야? 이제 애들도 어느 정도 다 키웠으니 어디 갈까?"
경순은 답은 들을 생각도 없이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이미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떠 있는 듯했다.
"하와이 어때? 하와이 해변에서 칵테일 한 잔 마시며 느긋하게 쉬고 싶다. 호호호~"
정윤도 경순의 말에 좋다면 반색한다.
"좋다! 나도 한 번도 안 가봤는데~ 너네도 알잖아. 원래 나 하와이로 신혼여행 가고 싶었는데 남편이 그렇게 유럽을 고집해서 못 간 거~ 내가 그때 삐져서 너랑 하와이는 가지 않겠다 했는데 너희들이랑 가면 너무 재밌을 것 같아." 그녀는 여행지를 상상하듯 눈을 반짝였다.
"12월 중순부터 3월이 성수기라는데 우리 아예 연말연시에 새해 여행으로 갈까? 인자야, 너도 좋지?"
정윤도 경순이가 탄 비행기에 같이 탄 듯 흥분하며 인자도 같이 탑승하길 기대하며 묻는다.
그러나 인자는 뭔가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그녀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을 들어 입을 축였다. 경순과 정윤은 서로의 흥분된 대화를 멈추고 인자를 바라보았다.
“인자야, 너 왜 이렇게 조용해?” 정윤이 물었다.
“그러게. 뭔가 할 말 있어 보이네? 넌 안 돼?” 경순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인자는 살짝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못 가.”
"왜? 설마 셋째?"
경순이 농담처럼 던진 말에 인자는 "어." 하고 짧게 대답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경순과 정윤의 눈이 커지며 동시에 웃었다.
“진짜야? 하하하~ 웬일이야~ 야, 축하해!!”
놀란 경순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인자의 손을 잡았다. “언제 알았어?”
“오늘” 인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다야, 여행은 좀 미뤄야겠다.”
정윤은 잠시 말을 잃은 듯하다가, 곧 환하게 웃었다. “와, 대박이다! 축하해, 인자야! 셋째라니, 완전 축복이야. 나는 쌍둥이 키우는 내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네 앞에선 명함도 못 내 밀겠네~
인자의 임신 소식이 전해지고, 첫 순간의 놀라움과 축하가 지나자마자 그녀의 표정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샤부샤부 냄비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경순과 정윤이 웃으며 축하해 줬지만, 인자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듯 보였다.
눈치 빠른 경순이 물었다. “근데 뭔가 더 고민이 있어 보이는데?"
인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기쁘긴 한데… 너희도 알잖아. 또 육아휴직하면 승진이 계속 밀릴 것 같고 다시 복귀했을 때는 아무래도 뒤처질 것 같아 걱정되네. 남편은 진작에 승진했는데 나는 아직도 제자리걸음인 것 같아서 자존심도 상하고."
인자의 말에 경순과 정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인자가 느끼는 그 무거운 부담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같은 워킹맘으로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어려움과 사회적 기대 속에서 여성이 느끼는 압박감은 너무도 현실적인 것이었다.
“인자야,” 정윤이 부드럽게 말했다. “너무 혼자만 그렇게 속상해하지 마. 우리도 다 똑같은 고민 했잖아. 나는 쌍둥이 키우느라 더 길게 쉬었고...... 복귀했을 때 나 대신 다른 사람이 자리 잡고 있는 게 그때는 정말 속상했는데 실력은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결국 네가 만들어놓은 자리를 되찾을 수 있어."
인자는 여전히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이 추천한 샤부샤부를 먹지 못하고 있었다.
“알아, 근데… 조직은 나 같은 사람 하나 잊기 쉬운 것 같아. 현실은 그렇잖아? 경쟁도 치열하고, 난 지금 경력 쌓는 시기에 애만 계속 낳고 있는 기분이야.”
그 말에 정윤은 인자의 손을 꽉 잡았다. “무슨 소리야! 너 같은 애국자가 어딨냐? 상을 줘도 시원찮을 판에. 안 그래? 넌 지금도 충분히 대단해. 셋이나 키우면서도 이 정도로 일 잘하는 사람 드물어. 그리고 회사도 네 가치를 알 거야. 그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그게 회사 문제지, 네 잘못은 아니잖아? 잠깐 멈추는 것 같아도, 긴 인생을 보면 그게 큰 차이가 나진 않더라고.”
늘 농담을 건네던 경순도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우리 인생은 직장뿐만 아니라 가족도 중요해. 육아 때문에 잠시 멈출 순 있어도 그게 결코 너를 덜 대단하게 만들진 않아. 그리고 요즘엔 회사들도 육아휴직을 존중하는 분위기잖아. 그동안 네가 해온 노력들이 절대 무시되지 않을 거야. 야, 어서 먹기나 해~ 임신 초기에 잘 먹어야지!”
인자는 친구들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복잡한 감정이 있었지만 경순과 정윤의 따뜻한 위로에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 뭐 어떻게 되겠지~ 고마워, 정말. 오늘 너희들 만나길 잘했네."
그렇게 세 친구는 샤부샤부를 앞에 두고 다시 웃음소리를 나누기 시작했다. 여행계획이 잠시 미뤄졌지만, 그들에겐 앞으로 더 많은 시간과 추억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