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훈은 오후 4시가 되자마자 단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잠시 멍하니 쳐다봤다.
육아시간을 사용해 일찍 퇴근하는 단이의 모습은 매일 반복되는 일이었지만, 최근 들어 상훈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불편함이 쌓이고 있었다.
'육아시간이 법적으로 정해진 권리라는 건 알겠는데... 의무적으로 써야는 건 아니잖아?? 내가 대신 처리해야 할 업무가 늘어나는 건 알고 계실까?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남아 있는 사람 배려도 해 주면 좋을 텐데.'
상훈은 단이가 나간 후에도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컴퓨터 화면에 떠 있는 업무 리스트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오늘도 내가 이거 다 처리해야 하는 건가…" 매일 반복되는 상황에 쌓인 피로감이 점점 더 크게 느껴졌다.
그때 옆자리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인자가 상훈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상훈 씨, 일할게 많아요? 아님 무슨 고민 있어요? 단이 육아시간 쓰는 거 때문에 힘들어 보이는 것 같아서."
상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그래요. 단이 선배가 일찍 퇴근하는 건 당연히 육아 때문에 필요한 일이란 걸 이해는 하지만 처음엔 괜찮았는데 요즘은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훈의 말을 경청했다.
"그럴 수 있죠. 아무래도 상훈 씨 입장에서는 단이가 빠진 자리를 채우느라 힘들 거예요. 그런데 저도 애 키워봤잖아요. 사실 단이도 육아시간 때문에 퇴근은 하지만, 집에 가면 그때부터 진짜 일이 시작되거든요. 애 보느라 정신없을 거예요. 워킹맘들끼리 하는 말이 있는데 회사에서 퇴근하면 집으로 다시 출근한다고 해요."
상훈은 인자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건 알죠.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는 상상도 못 하겠어요. 하지만 저도 업무가 쌓이는 게 점점 버거워져서… 그게 저도 모르게 불만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인자는 상훈을 이해한다는 듯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상훈 씨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해요. 힘들고 불만이 생긴다는 걸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네요. 그런데 단이도 본인 일을 줄이는 게 아니라, 육아 때문에 다른 책임을 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서로 조금씩 이해해 주면 더 좋은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상훈은 인자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너무 제 입장만 생각했을 수도 있겠네요. 단이 선배도 일찍 퇴근하긴 했지만, 그만큼 힘든 일정을 보내고 있겠죠."
"그렇죠. 상훈 씨도 이제 좀 더 넓게 보고 이해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미래에 상훈씨도 육아시간이 필요한 날이 생길 수도 있으니..... 나도 워킹맘으로서 육아시간 덕분에 숨통이 트였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물론 업무가 몰리면 힘들겠지만, 단이도 애 키우면서 일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어쩌면 육아보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상훈은 인자의 말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자와의 대화로 단이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 본 계기도 되었지만 한 편으론 가재는 게 편이란 마음도 들었다.
상훈은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단이 선배는 맨날 육아시간 쓰고 일찍 가니까 내가 그거 다 커버치고 있잖아.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솔직히 너무하는 거 아냐?”
그 말을 들은 민지는 잠시 상훈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상훈아, 단이 선배가 왜 육아시간을 쓰는지 알잖아. 17개월 된 딸을 혼자 키우면서 일도 병행해야 하는데, 얼마나 힘들겠어.”
상훈은 말없이 테이블에 놓인 스마트폰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표정이 굳어졌다.
“알지, 알긴. 그런데 회사는 회사잖아. 내가 요즘 얼마나 스트레스받는지 너도 알잖아. 내가 혼자서 다 처리해야 하니까. 인자 선배는 같은 여자라고 단이 선배 편만 들고, 내 입장 이해한다고는 하지만 말로만인 것 같아. ”
민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상훈의 눈을 맞추었다. 그가 느끼는 불만과 스트레스가 얼마나 클지 이해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에게 무언가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자기야,” 민지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갑내기 여자친구인 민지는 무언가 진지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땐 항상 '자기야'라고 부르며 상훈을 긴장시켰다.
“단이 선배 같은 사람이 우리 직장에 몇이나 될 것 같아? 일하면서도 육아까지 혼자 감당해야 하는 여자들이. 혹시 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너도 힘들 때 누군가 이해해 주길 바라지 않았을까?”
상훈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민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단이 선배가 얼마나 아등바등하며 직장생활을 하는지 알고 있었고, 그녀가 가정에서도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자신도 마찬가지로 매일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기에, 그 불만이 무의식 중에 커져가고 있었다.
“나는 단순히 불만을 말한 거지 사람을 미워하는 건 아니야. 그런데도 내가 힘든 건 사실이잖아.”
민지는 그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쥐었다.
“맞아, 너도 힘들겠지. 하지만 단이 선배도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나중에 우리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우리도 육아시간 쓰고 휴직도 할 텐데 좀 더 이해하고 배려하면 어떨까? 아마 단이 선배도 매일 육아시간 사용하는 게 그리 마음 편하진 않을 거야. 눈치도 보일 테고."
상훈은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의 민지와의 모습을 상상하니 단이에 대한 불만의 감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상훈이 내려놓은 식은 커피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