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시간 2

by 온리원

단이는 오전부터 쌓인 민원서류들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은 관공서에 이렇다 할 민원을 넣어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이 사람들은 뭐가 그리 불편하고 불만이 많은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납득이 가는 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민원은 개인적인 의견을 늘어놓아 공감이 안되었다. 컴퓨터 화면에 띄워진 내용들을 한참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의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어린이집 알림장.

늘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는 알림장이지만 직감적으로 좋지 않은 소식임을 알아차린 단이는 재빨리 확인했다.


[오늘은 새 노래 시간에 <리듬악기 노래>를 배웠어요. 친구들과 노래에 맞추어 합주(?)도 해 보았답니다. 여러 가지 악기를 번갈아 연주해 보았는데 지우는 트라이앵글이 제일 좋다고 하네요.

* 낮잠 자고 일어나서 37.8도까지 열이 올랐네요. 그래도 잘 놀고 있는데 좀 힘들어 보이기도 해요. ]


단이의 마음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아침에 등원 준비를 할 때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엄마의 복직이 지우에게도 스트레스로 전달이 된 것만 같아 무거운 책임감과 동시에 가슴을 죄는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현실은 단이의 편이 아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수많은 서류들과 박 과장의 따가운 시선이 단이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단이의 업무 대행자인 신입 직원 상훈.

육아시간을 사용하느라 매일 오후 4시에 퇴근하는 단이에게 상훈은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현한 적은 없지만, 그래서 단이는 더욱 그에게 미안하고 눈치가 보였다.


단이는 잠깐 망설이다가 팀장인 정연실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저 아이가 오늘 갑자기 열이 난다고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와서...... 지금 하고 있는 것까지 다 마무리하고 가려했는데 아무래도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나머지는 상훈 씨에게 맡겨도 될까요?"

정 팀장은 단이의 근심 어린 얼굴을 한참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이가 아프면 어쩔 수 없지. 어서 가 봐."


단이는 팀장의 이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가슴 한편에는 미안함과 부담감이 남아있었다. 상훈에게 업무를 부탁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자리로 돌아와 상훈을 보니 그는 이미 바쁘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상훈 씨, " 단이는 머뭇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미안해요, 오늘도 제가 일찍 퇴근해야 할 것 같아요. 지우가 열이 나서........ 이것만 좀 부탁할게요."


상훈은 잠깐 눈살을 찌푸리며 단이를 쳐다봤지만, 곧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쩔 수 없죠. 내일 뵐게요."


상훈의 짧은 대답에 단이는 신경이 쓰였다. 분명 상훈도 지쳐 있을 텐데, 또 그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지우가 기다리고 있을 어린이집을 떠올리니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정말 미안해요, 상훈 씨. 하다 모르는 것 있으면 전화 줘요."

단이는 재빨리 짐을 챙기며 말했다.


사무실을 나서는 단이는 상훈에게 빚진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상황은 계속 반복될 텐데, 어떻게 하면 서로가 마음 편하게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지 누가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이의 마음은 무거웠지만 엄마로서, 그리고 직장인으로서 두 가지 역할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마음을 다스렸다.


단이는 지우가 잠든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거실의 조명은 은은하게 낮아져 있었고, 늦은 밤의 고요가 집안을 감싸고 있었다. 침대에 곤히 잠든 지우는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였다. 마치 하루 종일 단이의 속을 태우던 모든 일이 이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며 조금은 흐려지는 듯했다.


단이는 조용히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 한 캔을 꺼내 들었다. 톡 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하루의 피로가 천천히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직장에서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업무와 상사의 눈치 속에서 애써 웃어야 했고, 집에서는 지우의 울음소리에 마음이 쪼개지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엄마로서의 책임감과 직장인으로서의 역할, 두 가지를 동시에 잘 해내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단이는 맥주 캔을 손에 든 채로 거실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회식을 마치고 온 정훈은 약간 붉어진 얼굴에 기분은 좋아 보였다.


“왔어?” 단이는 아는 체를 했다. 서운한 감정은 숨긴 채.


“응, 회식 잘 끝났어. 다들 고생했다고 술 한잔씩 주는데 받아먹느라 힘들었어~"

정훈은 웃으며 대답했다.


단이는 잠시 정훈을 바라보다가, 맥주 캔을 들고 한 모금 더 마셨다.

'너는 술 받아먹느라 힘들었냐, 나는 애 보느라 힘들었다.'

속마음은 정훈을 향한 원망의 소리가 나왔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지우가 오늘 어린이집에서 열이 났어. 그래서 일찍 퇴근하고 소아과 갔다가 저녁 먹이고 약 먹이고 이제 겨우 재웠어.”


정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래? 열 많이 났어?”라고 물었다. 그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단이의 속은 미묘하게 뒤틀렸다.


"자기야, 나 혼자 이러는 거 정말 힘들어." 단이가 차분하지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회식하고 와서 기분 좋아 보이지만, 나는 매일 육아시간 쓰느라 눈치 본다고. 집에 와서도 지우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나면 집안일에, 또 내일 준비까지...... 같이 돈 버는데 왜 나만 희생해야 해?"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속마음이 커져버려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정훈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야? 나도 나름대로 하잖아. 오늘은 회식 있다고 진작부터 얘기했던 거고. 나도 회사에서 내내 회식 준비하고 사람들 챙기느라 신경 쓰였다고. 집에 오면 좀 쉬고 싶어.”


단이는 그 말에 더 화가 나고 속이 답답해졌다.

“나랑 지우는 안중에도 없어? 집에 오면 좀 쉬고 싶다고? 나도 힘들고 나도 쉬고 싶어. 그런데 왜 집안일이 항상 내 몫인 것처럼 돼? 지우 보는 것도, 집안일도 다 나 혼자 하고 있잖아.”


정훈은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말하면 나도 억울해. 나도 나름대로 도와주려고 했잖아. 근데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단이는 맥주 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민? 내가 하는 것만큼 해봤어? 하루종일 아이 보고 집안일도 하고 회사일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해 봐. 그게 예민할 일이야? 육아와 가사는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해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나 혼자만의 일이냐고!”


정훈은 단이를 바라보며 당혹스러워했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 그냥 나도 지쳤다고 말한 거야.”


단이는 그간의 설움이 터졌다. '수고했다, 고생했겠다'는 한 마디 위로가 있었다면 언쟁은 시작되지 않았을 텐데 그녀의 기분을 알아주지 않은 정훈이 야속했다.


"우리 둘 다 지쳐있는 건 알아. 그래서 더더욱 서로 도와야 하는 거 아니야? 나도 회사에서 하루종일 일하고, 집에 오면 지우 돌보고 집안일하느라 쉴 틈이 없어. 그런데 너는 집에 오면 그냥 쉬기만 하잖아. 이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정훈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단이의 목소리는 흔들렸지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일과 가정을 동시에 챙기려는 부담감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결국 뜨거운 눈물이 단이의 두 볼을 타고 내렸다.

당혹스러움도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정훈은 단이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미안해, 자기가 너무 잘하고 있으니까 내가 많이 기대고 있었던 것 같아. 앞으로는 좀 더 잘할게. "


단이는 감정이 정리되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나도 너만 힘든 거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어.”

그녀는 다시 소파에 앉아 맥주 한 모금을 마셨다. 작은 갈등이었지만, 그들은 조금씩 이해하고 맞춰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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