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이 된 첫째 아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한다.
그 나이대에는 또래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고, 사춘기 아이들에게는 전부인 것이 당연한 일이다.
요즘 큰아들의 모습을 보면, ‘나도 중학생 때 저랬나?’ 싶을 정도로 모든 일의 우선순위가 친구에게로 향해 있다. 방 안에 틀어박혀 세상과 단절하고 사는 꼴도 못 봐주겠지만, 본인이 해야 할 일들을 미루고 친구들과 놀기만 하는 것도 엄마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다.
지난 주말, 첫째는 친구들과 놀이동산에 간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부모의 도움 없이 친구들과 함께 대중교통을 타고 나서는 모습이 대견했다.
휴대폰 관리 앱으로 위치를 확인하니 무사히 도착했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놀이기구를 타는 모습이 눈에 그려져 안심이 되었다.
아이들은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긴 줄을 서 있어도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을 것이다.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단풍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겠지.
그저 집과 학교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을 것이다.
정신없이 웃고 떠들며, 서로의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놀이기구에 타며 환호하는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늦은 오후가 되니 해가 짧아져 금세 어둑해졌다.
저녁을 먹고 불꽃놀이까지 보고 오겠다는 아들의 말에 걱정이 스쳤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 쿨한 엄마의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 실컷 놀다 와.” 그렇게 말은 했지만, 마음 한켠은 계속 불안했다.
나는 [불안] 엄마다.
특히 보호가 필요한 어린 자녀들이 내 눈앞에 보이지 않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면 불안은 더 커진다. 이제는 더 이상 부모의 통제를 원치 않는 큰아이에게도 마찬가지다.
혹시 친구들과 어울리다 나쁜 행동을 하지는 않을까, 밤늦게 돌아다니다 사고라도 당하지 않을까, 활발한 겉모습과는 달리 말 못할 고민에 잠겨 있지는 않을까.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내 불안을 끝없이 부풀린다.
이토록 불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이 흉흉해져서일까?
내가 생각한 만큼 아이들에게 풍족하게 채워주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아들을 믿지 못해서일까?
불안함의 이유를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아마도 아이의 ‘안전’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는 부모가 아무리 지키려 해도 막을 수 없는 일들이 있고,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언제든 벌어질 수 있으니까.
엄마의 불안은 아이들이 금세 눈치챈다.
“내가 알아서 할게~!”
친구들과 있으면 천하무적인 양,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첫째의 표정이 아직은 철없고, 또 대견하다.
도대체 뭘 알아서 하겠다는 건지, 속으로는 걱정이 앞서지만
이제는 믿고 기다려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불안은 엄마의 본능이지만,
그 불안을 아이의 성장으로 이겨내는 것이 진짜 ‘믿음’ 아닐까.
오늘도 나는 불안을 품은 채,
아들의 이름이 휴대폰 화면에 뜨기를 기다린다.
“엄마, 나 지금 가는 중이야.”
그 짧은 한마디에 마음이 놓이는 — 그런 [불안] 엄마다.
엄마의 불안은 단순한 걱정이 아닌, 사랑과 책임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