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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Aug 02. 2021

박사유감

박사에게 의존하는 우리들...  내 인생도 그들에게 맡겨볼까?

 ‘무덥다’, ‘정말 찜통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 예년과 별 차이가 없는 올여름의 한낮. 나는 평소의 습관대로, 그리고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실내로 파고들고자 하는 육신의 본능을 좇아 잰걸음으로 대형서점에 진입한다.

 역시나 서점 초입부터 ‘투잡하는 K대리’, ‘생초보도 따라하는 주식’, ‘월급쟁이 건물주 되기’ 등의 ‘과연 가능할까?’ 생각되는 제목으로 고객들의 동선을 방해하는 인기서적의 광고매대를 스타워즈 우주선이 혹성 피해가듯 익숙한 조종솜씨로 하나씩 지나친다. 평소 궁서체로 살아간다는 얘기를 듣는 나이기에 요즘 일곱 살 장난꾸러기와 칠팔십 어르신들도 뛰어든다는 주식의 세계는 영원한 나만의 신대륙으로 남겨놓으려 마음먹은지 꽤 되었다. 하지만 육아와 교육도서 코너 앞에서는 잠시 중립기어를 놓고 이 책, 저 책 살펴보며 ‘혹시 우리부부가 육아에 있어 놓친 부분은 없는지’ 확인해보기도 한다.

 역시나 페이지를 넘기는 매순간 탄식이 나올 정도로 잘 쓰여진 ‘우리아이 착하게 만드는 법’, ‘내자식 명문대 보내기’, ‘자녀양육 십계명’ 등의(실제 제목이 아니다) 책들은 아이가 이러저러할 때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한다는 식으로 자세하고 명확한 매뉴얼(?)을 소개하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다가 중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금붕어 키우기’, ‘애완동물 사육법’을 다시 어른이 되어서 읽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단 책만이 아니다. 요즘 공중파에서는 생활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영상으로 보여주며,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전문가가 제시해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고 있다. 마찬가지로 생활(?)에 문제가 있는 반려견을 영상으로 보여주며, 전문가가 직접 훈육을 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식은 그 대상만 유아와 반려견의 차이일 뿐 대동소이 하다. 이는 마치 가전제품 사용설명서의 뒷부분에 어떤 오작동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인격체인 우리 아이가 반려견과 같은 행동 기제를 가지고 있고, 가전제품과 같은 원리로 작동(?)된다는 말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어느덧 전문가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전국팔도의 건설현장 공사판을 십수년 누벼온 옆집 김씨 아저씨도, 팔남매를 키우시고 다 시집장가 보내셨던 아랫집 할머니도 건축사 혹은 건축학 박사, 교육학 박사 앞에서는 조용히 있어야 한다. 아니, 조용할 것을 요구받는다. 특히 박사학위를 외국에서 받아온 경우라면 그 권위는 그냥 자장면에서 자장면 곱빼기로 업그레이드 된다. 문제는 전문가가 개입하여 그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되는 분야가 있고, 그렇지 않은 분야가 있는 것인데 육아와 같이 집안이나 부모 고유의 교육관이 투영되는 분야에도 전문가가 매뉴얼을 조선시대 방(榜) 마냥 벽에 붙여놓는다는 것이다. 물론 박사로 위시(爲始)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기 위한 노력은 얼마전 박사수료를 하고 머지않아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박사(博士). ‘전문 학술 분야에서, 연구가 깊고 뚜렷한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대학에서 수여하는 가장 높은 학위’라는 사전적 의미와 같이 어느 한 분야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공식적인 인정이다. 하지만 박사는 박사일 뿐, 우리 삶의 가장 민감한 부분인 자녀교육이나 부부·가족관계, 죽음, 바람직한 인생에 대한 매뉴얼을 줄 수는 없다. 


  나와 아내를 닮은 내 아이에 대한 가정교육은 우리 부부가 직접 고민하면서 해나가야 하며, 그 과정에서 부득이 좌충우돌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다. 현대인들은 굳이 이러한 시행착오를 피하기 위해 교육학 박사님의 직접적인 지도, 즉 가장 효율적이고 단기적인 효과를 볼 수 있는 처방을 갈구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알 삼키면 기침이 뚝 그치고 가뿐해지는 독한 처방전만을 원하니, 박사들의 입장에서는 이에 부응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극한의 실용성과 효율성이라는 경제학 관념이 모든 가치를 지배해

버린 이 시대, 우리들은 삶의 모든 문제를 ‘박사’라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맡겨야 하는 영역과 우리 스스로 헤쳐나가야 하는 영역을 분간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는 또다른 어떤 ‘박사’가 개입하여야 하는 것인가? 영광스럽고 값진 단어이자 모습인 '박사(博士)'를 내가 유감스럽게 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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