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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Aug 01. 2021

이규보의 거울

고전수필 '경설(鏡說)'에 대한 고찰 (월간 수필문학 8월호에 연재)

 거울만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는 사물이 또 있을까 싶다. 서양부터 살펴보면 영어의 speculation(명상)은 라틴어에서 거울을 의미하는 speculum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상세하게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철학적으로도 거울은 심오한 인식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 동양에서는 경(鏡)이라 하여, 범인(凡人)은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보는 도구로, 군자는 반성과 성찰의 의미로, 혹은 거울의 그 맑은 기품을 즐기는 낙(樂)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파경(破鏡)이라 하여, 부부의 헤어짐을 ‘깨진 거울’에 비유하는 것은 이미 우리도 익히 알고있는 바이다.


 필자가 이곳에 처음으로 소개할 이규보의 ‘경설(鏡說)’이라는 작품도 거울을 소재로 한 처세훈(處世訓)이라 할 수 있다. 먼저 고려 고종(高宗) 때의 문인 이규보(1168~1241)에 대해 소개를 하자면,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한 것이 대표적인 그의 업적으로 볼 수 있겠고, 명문장가로서 시·술·거문고를 즐겨 삼혹호 선생이라 자칭했으며,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백운소설(白雲小說)>, <국선생전(麴先生傳)> 정도를 들 수 있다. 이규보는 자신의 호인 ‘백운거사(白雲居士)’를 의식해서인지 ‘경설’에서 허구의 거사(居士)를 통해 자신을 대변한다.     


    

 거사에게 거울 하나가 있는데, 먼지가 끼어서 마치 구름에 가려진 달빛처럼 희미하였다. 그러나 조석으로 들여다보고 마치 얼굴을 단장하는 사람처럼 하였더니, 어떤 손(客)이 보고 묻기를,
 “거울이란 얼굴을 비추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군자가 그것을 대하여 그 맑은 것을 취하는 것인데, 지금 그대의 거울은 마치 안개 낀 것처럼 희미하니, 이미 얼굴을 비출 수가 없고 또 맑은 것을 취할 수도 없네. 그런데 그대는 오히려 얼굴을 비추어 보고 있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거울이라는 사물의 통념을 손이 밝히며, 범인(凡人)과 군자의 경지에까지 다다르는 것으로 보아 손도 그리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거사는 희미한 거울을 하루종일 들여다보는 괴팍한 취향을 가진 인물로 일견 보이는데, 이규보는 거사의 목소리를 빌려 미증유(未曾有)의 유추(類推) 혹은 유추(類推)의 미증유(未曾有)를 할 수 있는 판을 스스로 깔아놓는 것이다.


거사는 말하기를,        


“거울이 밝으면 잘생긴 사람은 기뻐하지만 못생긴 사람은 꺼리네. 그러나 잘생긴 사람은 수효가 적고, 못생긴 사람은 수효가 많네. 만일 못생긴 사람이 한번 들여다보게 된다면 반드시 깨뜨리고야 말 것이네. 그러니 먼지가 끼어서 희미한 것만 못하네. 먼지가 흐리게 한 것은 그 겉만을 흐리게 할지언정 그 맑은 것은 상우지 못하니, 만일 잘생긴 사람을 만난 뒤에 닦여져도 시기가 역시 늦지 않네.
아, 옛날 거울을 대한 사람은 그 맑은 것을 취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내가 거울을 대하는 것은 그 희미한 것을 취하기 위함인데, 그대는 무엇을 괴이하게 여기는가?”     


하였더니, 손은 대답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이규보는 한시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건국자 주몽의 일대기를 내용으로 한 영웅서사시인 ‘동명왕편(東明王篇)’도 그의 작품이다. 하지만 위와같이 권위있는 수필가로서의 입지도 탄탄하다. 모두가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슬견설(蝨犬說)>, <돌과의 문답>, <게으름뱅이의 역설> 등의 수필은 그의 천재적인 역발상과 삶에 대한 심오한 철학과 경륜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슬견설’이나 이 작품인 ‘경설’의 장르인 ‘설(說)’은 일종의 한문 수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설(說)’은 사실을 제시한 후 작가의 의견을 밝히거나, 작가의 경험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깨달음을 서술하는 방식을 주로 취한다. 즉 이치에 따라 사물을 해석하고 시비(是非)를 밝히면서 자기 생각을 설명하는 한문의 한 문체인 것이다.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비교적 장황하게 논술해나가는 것이 특징이며, 비유나 우의적인 표현이 주로 나온다.위 손의 질문에 대하여 거사는 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을 예시로 들어 군자와 같이 도덕적으로 결점이 없는 소수의 사람을 잘생긴 사람에, 도덕적으로 결점이 있는 다수의 사람을 못생긴 사람에 비유하였다. 거사는 사물에 대한 통념을 제시하는 손의 질문에 개성적인 관점으로 자신의 처세를 나타내고 있다. 거사는 자신이 거울을 대하는 것은 그 희미한 것을 취하기 위함이라고 피력함으로써 깨끗함만을 추구하기 보다는 사람의 단점과 결점을 포용할 줄 아는 유연한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손은 결국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는데, 아마도 거사의 역발상적인 시각에 공감해서가 아니었을까?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 ~ 1241)  


이규보는 사실 ‘경설’에서뿐 아니라 ‘견설’이나 다른 작품에서도 역발상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역발상이라는 것은 대상과 현상의 해석에 대한 상당한 자신감에서 비롯하게 되는데, 이규보는 봄철 밭갈이를 하듯 기존의 상식과 통념을 뒤엎는 시도를 즐긴 것 같다.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의 자신감의 근저에는 최씨 무신정권이라는 든든한 권력층이 자리잡고 있었다. 최고 권력자 최충헌에 의해 등용된 이규보는 철저하게 권력과 함께 하고픈 욕망으로 붓을 들었는데, 이 때문에 ‘어용 지식인’이라는 비판도 적지않게 받고 있다. 무신정권 시기의 지식인 중에서 이인로, 임춘 등 기존 귀족 출신들은 현실을 도외시한 채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는 그들만의 도피자 모임을 결성하고 현실과 결별하였다. 이와 반대로 이규보는 신진 사대부에 속해 있으면서 최씨 정권의 눈에 들기 위한 각별한 노력을 하였으니, 이규보의 처세를 비판하는 문인들이 없는 것이 이상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항상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았을 이규보는 ‘경설’을 통해 자신을 공격하는 잘생긴 사람, 맑은 거울을 보는 사람을 오히려 질책하고 있다. 당시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세상을 버리고 도피하여 잘못된 세상과 결별하고자 하는 사회 풍조와, 지나치게 결백하고 청명한 태도를 지닌 사람들을 비판함으로써 침묵보다는 이들에 대한 역습을 선택했던 것이다.     


 어느 세상의 지배계층이 바뀌게 되면, 그 세상과 결별하여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려는 사람, 현실에 순응하여 나름의 재능을 꽃피우려는 사람으로 양분되기 마련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의하겠으나, 지나치게 무결점을 추구하다 보면 지조를 지키다 굶어죽은 중국 주나라의 백이·숙제(伯夷叔齊)가 되고 만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1418~1456)은 <수양산(首陽山)을 바라보며>라는 그의 시조에서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어먹는 채미(採薇)를 하였다고 비판하는데, 깨끗함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남들에 대한 비판을 일삼으면서도 오히려 자신들이 깨끗함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이규보의 거울을 통해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이규보의 ‘경설(鏡說)’은 고전수필이지만, 현재 우리들 사이에서 손과 거사는 함께 살아가고 있다. 당신은 과연 누구의 거울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가?    



- 윗글은 월간 수필문학 2021년 8월호에  '현대수필가가            바라본 고전수필' 이라는 제목으로 연재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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