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명 Feb 22. 2022

2022년에 찾아온 정약용의 유산

다산 정약용의 『유산으로 남기는 두 글자, 근과 검』에 대한 소감

내가 벼슬을 하는 동안에 너희에게 물려줄 자그마한 밭뙈기조차 장만하지 못했구나. 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 잘 살 수 있도록 정신적인 부적 두 글자를 너희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겠다. 너희는 야박하다고 서운해하지 말고, 마음에 지니도록 해라. 한 글자는 '부지런할 근(勤)'이요, 또 한 글자는 '검소할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논이나 기름진 밭보다도 나으니, 평생토록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 


        

 설마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자녀들에게 보낸 위 편지글을 너무나 흡족하게 여긴 나머지 “정신적인 부적 두 글자를 너희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겠다.”라는 문구를 차용하여 오는 명절 자식들 앞에서 위엄스레 하사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만약 그랬다가는 나름 장을 보아 애써준비한 생선전이며, 잡채, 불고기를 입맛이 없는지, 속이 안 좋은지 깨작거리며 툴툴대는 아들 딸을 마주하게 될 테니 말이다.     


                               응?  왜 잘 안먹지?   난 자식들에게 덕담을 해준 것 뿐인데...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정약용은(1762~1836) 18년간 경상도 장기와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이 세월 동안 500여권의 책을 저술함으로써 오히려 조정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점에서 다산 정약용은 주옥같은 그의 저술뿐만 아니라 생애 그 자체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인생에서의 미끄러짐은 오히려 성공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라는 이 교훈은 아마 정약용이 의욕적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22세에 과거인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서울의 성균관에서 수학했을 정도로 엘리트 코스를 밟았음에도 그의 출세가도(出世假道)는 다산을 지극히 아끼고 신임했던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1752~1800)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고 만다.      


 정약용은 사실상 천재였다. 『흠흠신서(欽欽新書)』를 보자면 법학자요, 『경세유표(經世遺表)』를 보면 정책가요,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는 지방 행정실무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산은 국가운영에 필요한 핵심사항들에 대해 폭넓은 식견 이상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수원성을 축조하는데 있어서 다산이 개발한 ‘거중기’는 단 40근의 힘으로 무려 625배나 되는 2만 5,000근이나 되는 돌을 들어 올렸는데, 성을 둘러본 정조가 “거중기를 써서 돈 4만 냥을 절약했구나.”하며 감탄을 하였다고 한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추구하는 경제학자이기도 했던 다산은 실학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다소 관념적인 발언을 자식에게 보내는 편지글에서 이어간다.     



 '근(勤)'이란 무얼 뜻하겠느냐?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에 할 일을 저녁으로 미루지 말며, 맑은 날에 해야 할 일을 비 오는 날까지 미루지 말며, 비 오는 날에 해야 할 일도 날이 갤 때까지 미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략)     


  그렇다면 '검(儉)'이란 무엇이겠느냐? 옷은 몸을 가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중략)  

       


 우리가 흔히 들어오던 ‘근검절약’에서 ‘근’과 ‘검’이라는 삶의 태도와 마음가짐은 그때로부터 200년 남짓 지난 오늘날, 우리에게 오롯이 적용하기가 주저되는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부 정책의 실패인지 어쩔 수 없는 주택시장의 상황 때문인지는 몰라도 최근 몇 년간의 아파트값 폭등과 전국적인 주식투자 열풍에서 정약용 경제학 박사의 위 당부는 옥수수 수염 마냥 흐느적 거리며 힘을 잃는다. 필자가 다산의 말에서 유의깊에 살펴보고 싶은 부분은 바로 ‘근(勤)’이다. 부지런함, 다시 말해 근면성실함을 다산은 ‘해야 할 일을 미루지 말고 때에 맞게 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가정과 사회에서의 여러 역할로 하루하루가 숨가쁘게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일상일 진대, ‘그 당시 그리 복잡한 사회도 아니었을 텐데 무슨 미루어야 할 일이 많았을까’라고 잠시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기계)자동화라는 것이 없어 모든 것을 손수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해야 했을 것이고, 파종과 수확에의 타이밍이 매우 중요한 농경을 주로 영위하였기 때문에 때에 맞추어 해야 할 일을 미룬다는 것은 곧 ‘가난’으로 직행하는 하이퍼루프(Hyperloop)에 타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는 비단 다산의 시대뿐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귀중한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정성이니, 모든 일에 속임이 없어야 한다. 하늘을 속이고, 임금과 부모를 속이고, 농부가 같은 농부를 속이고, 상인이 동업자를 속이는 것은 모두 죄를 짓는 것이다. 딱 한가지 속여도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의 입이다. 아주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생각하여 잠깐 동안 입을 속이면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이것은 곧 가난을 이기는 방법이 된다.   

  


 다산은 많은 분야의 학자가 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구도자(求道者)의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 

루쉰(1881~1936)의 『아Q정전』에서는 주인공 ‘아Q’의 정신승리법이 나오는데, 이 정신승리법은 예를 들어 불량배가 아Q에게 "따라해! 나는 짐승이다."라고 하면, "나는 버러지다"라고 자신을 더욱 미천하게 만들고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며 상황을 합리화하고 언제나 긍정적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다. 이는 신해혁명이 실패한 당시 중국(청나라)이 서방 열강들에게 굴욕을 당하면서도 과거의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아Q’라는 한심한 인물을 통해 형상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산은 아Q의 정신승리법을 발휘하는 듯, ‘아주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생각하여 잠깐 동안 입을 속이면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며 신라시대 원효대사(617~686)의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 심멸즉 감분불이(心滅則 龕墳不二)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 심외무법 호용별구(心外無法 胡用別求)’, 즉 ‘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감(龕)과 분(墳)이 다르지 않네.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현상이 또한 식(識)에 기초한다. 마음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의 가르침을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돈(경제)의 흐름이 축구공과 같은 원의 모습으로 ‘근검’에 따른 예측이 가능한 모델이었다면, 이제는 럭비공으로 ‘근검’보다는 ‘수많은 변수들로 인해 예측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통찰력(?)’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 지 오래이다. 그리고 정약용의 시대에는 오늘날 말하는 ‘근로소득’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반면, 지금은 금융소득, 임대소득, 이자·연금 소득 등 ‘비근로소득’의 비율이 기록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에 ‘가난을 면하고, 나아가 잘 살기 위해서는 근검을 생활화 해야 한다’라는 다산의 단순 경제학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약용의 『유산으로 남기는 두 글자, 근과 검』이라는 고전수필은 최소한 검(儉)이라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현대의 복합적이고 역설적인 경제구조와 상충되는 면이 적지 않다. 쓰지 않고 아끼기만 해서는 부자가 될 수 없고, 아Q의 정신승리법이 아닌, 레버리지(leverage)로 미국주식 무한매수법, 증여·상속세 절세법 정도가 되어야 자식에게 자신있게 물려줄 유산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고 공경하는 부모님의 모든 부분들이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점이 아닌 것처럼, 고전이라 하여 그 생각 전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또다른 의미의 ‘게으름’이다. 고전에 나타난 선인들의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우리 시대에, 그리고 나에게 맞게 ‘변형’ 내지 ‘가공’하여 재창조하는 것이 우리가 고전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순히 ‘누구를 계승한다’만을 외치는 정치가도 이런 의미에서 ‘게으른 대선후보’일 수 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안다는 논어 <위정편(爲政編)>에 나오는 공자의 말처럼, 과거가 아닌 미래를 바라보고 대비하며, 현재에 힘쓰는 가치관이, 인물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문득 경제학자 다산 정약용이 지금 이 시대에 살았다면 어떠했을지 생각해 본다. 다재다능하여 현대에서는 직업이 여러 개였을 다산은 필경 ‘검(儉)’은 제쳐두고, 경매와 주식서적을 수백권 집필하고 ‘다산 주식연구소’를 운영하며 관련 유튜버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6년전 호기심으로 사서 이자수익만큼도 벌지 못한 내 주식 30만원 어치와 앞으로 내가 얻게 될 비근로소득 전부를 걸어본다.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6년전에 산 주식 종목의 오늘자 그래프.  어떤 회사인지 알 수 있으려나?

       



작가의 이전글 우(友)들의 반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